영주권으로 가는 길
뉴질랜드에서의 첫 세 달은 우리에게 3년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남편과 내가 동시에 느낀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빨리 방학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랬는지 시간이 참 느리게도 갔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고, 직장을 다니고 했을 때는 시간이 쏜살같았다. 그렇게 계속 빨라지기만 했던 시간이 다시 느려진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남편도 느꼈고 말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었다. 우리는 흔히 즐거울 때 시간이 빨리 흐르고, 지루할 때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지루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일까? 남편과 나는 한 과학 기사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건 과학계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정설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 현상의 이유를 실험으로 밝혀냈다는 것이다. 뇌는 새로운 것에 자극받고, 자극받는 양에 따라 시간을 인지한다고 한다. 어린아이일수록 세상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것들이라서 하루 동안 뇌가 자극받는 횟수가 많기 때문에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많은 생동하는 것들이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법하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면서 반복되는 일상과 경험으로 인해 뻔한 것들이 늘어나면서 뇌가 자극받는 것이 드물게 일어나는데 그 자극이 일어날 때만 시간을 인지하게 되므로 정신 차려 보니 6개월이 흘러 있고, 1년이 흘러가 있더란 말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과 나에게 뉴질랜드는 첫 경험이었고, 세 달 동안 뇌가 자극받을 일이 무수히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가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고, 남편과 나는 이 현상을 우리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벌써 나는 1년의 어학 과정과 1년의 회계학 과정을 마쳤다. 회계학 과정은 어학을 하면서 느꼈던 좌절감에서 빠져나와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회계학에서의 영어는 어학과정에서의 영어보다 더 익숙하고 친근했다. 아는 만큼 들린다더니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영어도 더 잘 들렸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부터 강의 들을 것에 대한 불안감과 복습을 많이 해대겠다는 학구열로 펜 모양의 녹음기를 준비했었다. 드디어 그 녹음기를 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시간은 중급 재무회계 (Intermediate Financial Accounting) 시간이었다. 이 과목의 선생님 이름은 루디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회계사 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한 후 회계법인에서 2년 더 근무하다가 교편을 잡았다고 했다. 퇴사한 지 3년이 다 되어갔지만 공부한 기간과 일한 기간을 포함한 약 15년의 노력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강의 내용을 평가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음, 강의 내용이 이론보다는 실무 중심이군. 우리나라 대학 과정도 이리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루디의 농담에 학우들이 웃었다. 그 분위기가 좋았는지 루디는 연달아 농담을 몇 마디 더 내뱉었고, 또다시 교실 안이 웃음으로 채워졌다. 나는 웃지 못했다.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그 농담을 이해하고 싶어서 녹음 파일의 해당 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봤다. 끝내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역시 아는 만큼만 들린다라는 속담이 맞았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업은 세무(Taxation) 과목이었는데 지팡이를 든 할아버지 선생님이 힘겹게 걸어 들어오셨다. 나는 영어를 잘 알아듣기 위해 수업시간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았었는데 그 선생님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작아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도 잘 들리지 않았다. 녹음이 잘 되고 있을지도 걱정도 됐고, 사전 양해 없이 녹음하고 있는 것도 양심에 찔렸다. 나만 잘 안 들리는 것인가 하고 뒤에 앉아 있는 학우들을 둘러봤는데 중급회계 시간에는 안 보였던 얼굴도 꽤 있었고, 수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백인들(나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나 아직 인종으로 구분하여 인지하고 있다. 그것이 곧 인종차별로 가는 길일까?)은 하나같이 노트북으로 일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래도 세무 선생님, 클린턴이 농담을 던질 때면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저들 귀에는 딴짓을 해도 다 들리는가 보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린턴의 목소리는 작을 뿐만 아니라 키위 (뉴질랜드 사람들을 일컬음) 영어를 구사하고 있어서 빠른 속도로 웅얼거리고 있음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역시 집에 돌아와 녹음파일을 두 번, 세 번 들어본 들 안 들리던 것이 들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녹음을 포기하고 수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모르는 것은 질문 공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세무는 한국의 세무와 기본적인 구조는 같을지 몰라도 디테일이 너무나도 달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질문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수업이 있었던 날은 반드시 복습하고 모르는 부분을 모아 이메일로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내가 거의 그곳에 닿았다며, 책 어디를 보면 곧 알게 될 거라며 바로 정답을 주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오기와 자신감이 생겨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게 했다. 결국 나는 그 과목에서 A⁺⁺를 받았다.
1학기는 이렇게 새로운 학업 환경에 적응하는데 몰두해 있었고, 드디어 무시무시한 2학기가 시작되었다. 이 2학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무시무시했던 이유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시작한 내 중국인 친구, 제시로부터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2학기의 두 개의 과목은 앞선 과목의 상위 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구 및 조사 보고서를 써내야 하는 과목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인턴쉽이 포함되어 있는 과목이었다. 연구 과목은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해서 나의 담당 선생님의 승인을 얻어 제안서를 작성하고 연구를 진행한 후 그 결과물을 보고서와 발표 자료에 담아내는 것이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목을 시작 전부터 양대 장애물 중 하나일 것으로 예상했던 이유가 담당 선생님, 수자니가 초반부터 겁을 주기도 했고, 2학기 스케줄은 인턴쉽이 포함되어 있어 일정이 꼬이기 십상이라 학업 관리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는 조언을 제시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구 과목은 내 예상과 달리 석사를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정도로 정말 재미있었다. 결과도 상당히 만족스러웠고, 수자니도 나의 성과에 놀라워했다. 나에게 그쪽 재능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아직도 내 플랜 B에는 석사 과정이 들어 있다.
자, 이제 문제는 인턴쉽이었다. 스스로 인턴쉽 할 곳을 찾아 100시간을 채워 오는 것이 그 과목의 최종 목표였다. 기한 내에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경우 학교에서 나서 주겠지만 그 양에 한계가 있어 경쟁이 치열할 테니 그 지경까지는 가지 말라는 것이 담당 선생님의 당부였다. 그 과목은 1년짜리 회계학 과정의 마지막 학기에 있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석사 미만의 모든 과정은 마지막 학기에 인턴쉽이 의무화되어 있고, 학과마다 연수시간은 상이하다. 그리하여 그 과목의 수강생은 약 150명씩 두 반을 이루고 있었고, 학교에서 마련해주는 인턴쉽 자리는 고작 열댓 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중 회계직은 두세 개가 될까 말까라고 하니 나는 그 지경까지 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졸업도 하지 않은, 워크 비자도 없는, 뉴질랜드에서의 업무 경험도 없는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주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내 자기소개서 기술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난 그 모든 나의 결핍에서 왔을지 모를 낭패들을 외국인인 탓으로 돌렸다. 인턴쉽 등록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계사무소에 무작정 이력서를 첨부하여 이메일을 보내 무보수로 100시간만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 한인 회계사는 본인 사업의 협소함을 민망해했고 향후에도 정식으로 채용하지는 못할 것이라 미리 미안해하며 내 부탁을 받아 들어줬다.
그곳은 그 한인 회계사와 파트타임 직원 한 명이 일하고 있는 이 지역 유일의 한인 회계사무소였다. 이 지역의 한국인은 거의 99%가 이 곳에 세무를 맡기고 있으며, 한국인 클라이언트는 전체 고객의 60% 정도 해당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저 내 어림짐작이다. 이 회계사는 고객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으며, 나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다른 회계학 친구들이 주로 초밥 집 (Sushi shop)에서 캐셔로서 인턴쉽을 수행하고 있을 때 나는 운이 좋게도 이 곳에서 세무 시간에 배운 GST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부르는 부가가치세 명)와 관련된 일도 해볼 수 있었고, Xero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주로 사용하는 상용 회계프로그램 명)를 다뤄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가졌다.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마지막 학기가 나에겐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깨달음을 남기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만났던 선생님들의 다양한 출신(?)으로부터 나도 모르게 ‘혹시 나도?’ 하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루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왔고, 수자니는 스리랑카에서 왔고, 샤론은 방글라데시에서 왔고, 마하메드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왔다. 나는 성인이 되어 학업 후 이민에 성공했다는 국립대학의 이 이민자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 곳은 이민자의 천국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학원에는 한국인 선생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후에 이 한국인 선생님을 소개받아 지금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 선생님의 이력은 듣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볼 때마다 물어 그 옛날이야기들을 듣고 또 들었다. 이 선생님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영어 과목 교사를 선망하고 있어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고, 그 매력에 매료되어 몇 년 후 다시 뉴질랜드에 와서 이 학교에서 영어 교사 과정 (TESOL)을 수료하고 이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고 한다. 무려 경력이 25년이다. 낯선 땅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했을 그들의 용기와 성과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제 공부는 끝났다. 이제 더 이상 학교는 내 요람이 되어 주지 못한다. 나는 이제 소속이 없다. 내게 남은 과제는 취업, 오로지 취업뿐이었다. 그것도 2년 안에 이뤄야 한다. 멀고도 험난하다는 영주권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