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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혹박 Apr 11. 2021

4장. 이제 저도 유학생입니다.

유의: 자랑질 포함

 뉴질랜드에서는 만 3세가 되면 국적, 체류 목적, 비자 종류를 불문하고 무료로 하루 4시간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다. 둘째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남편이 보육을 담당하기로 했고, 큰 아이는 이미 만 5세를 넘긴 관계로 뉴질랜드의 학제 상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집에서 큰 아이의 학교까지는 28km로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었다. 남편은 그 거리를 하루 네 번 다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첫날, 교복을 입고 도시락을 넣은 가방이 아이에겐 무척 커 보였고 아이의 그 모습이 너무도 짠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 하고 혹독한 자기반성을 순간 하였다가 가방에 넣은 ‘Where is the toilet?’ (화장실이 어디예요?)이라고 적은 쪽지를 아이가 잘 기억하고 필요할 때 꺼내 써야 할 텐데 하는 걱정에 오싹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로 몇 번이고 아이에게 신신당부하였다. 큰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제대로 식사를 못한 것은 물론 안절부절못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큰 아이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못해도 죽지 않는구나. 그런 큰 아이를 통해 나는 용기를 얻었다.


 큰 아이 등교 일주일 후 나의 학교 생활도 시작되었다. 큰 아이의 좋은 출발의 정기를 애써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다가 집에 핸드폰을 놓고 왔다.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던 남편에게 집에 갈 때는 걸어서 가겠노라고 남편에게 호기롭게 말했던 것을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야 후회했다. 집에 어떻게 간담. 유난히도 길치인 데다가 왔던 길을 차 안에서 본 터라 어느 길로 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새로 개통한 남편의 핸드폰 번호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집 주소도 기억에 없었다. 우선 컴퓨터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하여 찾아간 곳이 도서관 로비였다. 그곳에는 컴퓨터들이 죽 일렬로 있었고, 빈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으나 낭패다.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있어야만 컴퓨터 사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리번두리번하였는데 눈에 확 들어온 것은 네이버 화면의 한글들. 용기를 내어 그 사용자에게 다가가 한국인임을 밝히고, 전후 사정을 얘기한 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한국인은 가던 참이라며 흔쾌히 자기 자리를 내어 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구글 지도에 학교 이름을 적고 그 주변의 길들에서 힌트를 얻고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 익숙한 길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그 주변의 사진을 보니 우리 집 근처가 맞다고 확신했다. 도로명 주소가 이래서 좋은 거구나 깨달으며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지도를 그리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내 예상대로 우리 동네가 보이자 성취감이 뿌듯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극적으로 집을 찾아 남편을 본 나는 마치 무용담이라도 되듯이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불어 어학 과정 같은 반 학우들과 수업 분위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진짜 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국립 폴리텍에 해당되는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총 다섯 단계의 영어과정이 있었고, 그중 나는 4단계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네 가지 영역이 일주일 간 골고루 분배되어 있었다. 한 선생님이 듣기와 말하기를 묶어서 맡았고, 다른 한 선생님이 읽기와 쓰기를 맡고 있었다. 언어학에 대한 이해가 잘 되어 있다고 느껴져서 시작부터 신뢰가 갔다. 우리 반에는 열댓 남짓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단연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한국인도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있었다. 나머지는 각각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피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었고, 그중 한 명은 알고 보니 아직 성인이 안된 10대도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어학연수가 유행이었었는데 그때 못 간 어학연수를 이렇게 뒤늦게나마 와서 어린 학생들과 다니게 되니 내 나이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 어학 과정은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학술적인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읽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로 만들어내는 능력, 학술적인 내용의 강의를 듣는 능력, 그것을 바탕으로 토론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원래부터 학교 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15년 만에 다시 열성적인 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어학 과정 내내 말하기 시간은 고역이었다. 아이엘츠 시험에서도 말하기 영역이 발목을 잡더니, 말하기 시간의 내 자신감은 발바닥 아래 있었다. 성인이 아직 안되었다는 그 어린 중국인 학생은 나와 토론 짝꿍이 되었을 때 내가 하는 말마다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려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영어를 빨리 늘게 해 준다는 당돌함이 내게는 없었다. 철면피 같아져야 영어가 빨리 는다는데 나는 그저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하루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오뚝한 콧날을 가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여학생은 크고 해맑은 눈으로 나에게 이렇게 물어 왔다.

“너 레벨 4인데 말을 왜 이렇게 못 해?” 

나에게 you는 그냥 ‘너’이고, 문장에서는 존대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학기가 진행되면서 나 말고 다른 한국인 두 명이 더 있었던 덕분에 그들은 이것이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영어의 각 영역 간의 불균형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있었으니, 그것은 글쓰기의 즐거움이었다. 처음에는 영문으로 300자 쓰기가 넘기 힘든 마의 장벽 같았는데 점차 숙련되면서 마지막 과제 1,000자 쓰기도 거뜬히 해냈고,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평도 받았다. 


 학기가 끝나갈 때쯤 비자와 관련이 있는 법인 이민법이 개정될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여기 오기 전부터 회계학 전공자들이 입학할 수 있는 1년짜리 졸업 후 회계학 과정(한국어로 풀어쓰니 조금은 우습게 들리는 학제이지만 한국에는 없는 학사와 석사 사이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영어 점수가 안 나와서 어학을 선행했던 것이고, 이 어학 과정을 수료하게 되면 입학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반에는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내 또래의 중국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녀도 중국에서 회계사로서 일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녀는 남편에게 정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일에 있어서도 지친 지 이미 오래라 쉬고 싶은 마음 반, 새 출발하고 싶은 마음 반으로 뉴질랜드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중국인들과는 달리 그녀와는 꽤 잘 통했다. 내가 안 되는 영어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깨달은 것은 의사소통에 대한 것이었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한 수단이라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영어를 배우고자 했던 목표의 절반은 이미 이룬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똑같은 나인데 어느 누구와는 의사소통이 통 안되고 다른 누구와는 의사소통이 잘 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과연 내 부족한 영어 탓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나에게 가지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은 모국어인 한국어로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민법 개정의 소식은 그녀와 내가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 이민법 개정 안은 3년 간의 학사 과정을 수료하면 3년짜리 오픈 워크 비자, 그러니까 어떤 고용주와도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안은 영어를 한 학기 공부했는데도 자신감이 없었던 나에게 아주 솔깃했다. 3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면, 학업적인 성과는 둘째 치고,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데 충분한 시간이 되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주, 뉴질랜드 공인회계사가 되는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고 또 한국에서의 학사 학위가 있는 경우 첫 학기 6개월을 감면받을 수도 있었다. 이를 두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남편과 상의해 봐도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당초 1년은 공부하고, 1년은 워크 비자로 살아보자 했던 계획이 이미 틀어져 6개월 어학공부가 추가된 상황이었고, 여기에서 2년 6개월을 더 공부한다는 것이 재정적인 부담도 컸지만 무엇보다 3년 워크 비자가 있다 한들 그걸 잘 활용하여 영주권의 길로 쉽게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개정 안이었다. 아직 시행되지 않은. 과거 평균 통과율이 40%를 넘기지 않는다는 영어 4단계 과정을 내 중국인 친구와 나는 통과했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이민법이 개정되는 것을 지켜보자는 마음에서 어학 마지막 단계 코스를 수강하기로 했다. 사실 내심은 1년짜리 회계학 과정이든, 2년 6개월짜리 회계학사 과정이든 영어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에 6개월을 유예한 것이었다. 


 중국인 친구는 당초 계획대로 1년짜리 회계학 과정에 들어갔고, 그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후, 이민법이 개정되었다. 개정 안에 있던 3년 학사 수료 후 3년 오픈 워크 비자 취득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추가로 1년짜리 회계학 과정도 학업 후 1년 워크 비자에서 2년짜리로 연장되었는데 그것만큼은 이번 학기 입학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중국인 친구는 이번 이민법 개정의 최대 수혜자로, 나로부터 명명되었다. 그 친구는 자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나도 아까웠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워크 비자가 1년짜리인지, 2년짜리인지, 3년짜리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이 될 사람은 1년짜리로도 충분히 될 것이고, 취업이 안 될 사람은 3년짜리로도 안될 것이다라는 것이 그 중국인 친구와 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 마지막 5단계 과정은 환상적이었다. 앞서 말한 그 글쓰기의 즐거움이 극에 달했다.


 읽기 및 쓰기 선생님이 내 구미에 맞는 수업을 선사해주었기에 학교에서의 시간이 즐거웠다. 그 선생님은 매일 수업의 시작을 5분 글쓰기로 했는데 그 날의 주제를 화이트보드에 적으면 우리는 자신의 글쓰기 노트에 5분 동안 글을 쓰고 글자 수를 세어 옆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매일의 주제는 선생님과 그날 관련 있었던 사연이거나 뉴질랜드의 그 날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주제에 대해 간단히 얘기 나누고 내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써보는 것은 내게 큰 재미가 있었고, 5분 동안 쓰인 글자 수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에세이 과제도 3번이 있었는데 과제 하나씩 끝낼 때마다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져서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학기 마지막에는 쓰기 시험도 있었는데 문제가 ‘주어진 두 사설을 인용하여 앞으로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인가, 더 나빠질 것 인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혀 쓰시오’였다. 그 시험에서 너무 뿌듯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평가를 받았다. ‘4시간 만에 이런 글을 쓰다니 놀랍다.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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