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을 가지 않고서는 못 고친다는,
뉴질랜드 살이를 목표로 정하고, 남편과 나는 우선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둘 다 영어 공부를 해본 지 오래였고, 회화는 아예 기초부터 안되어 있었다. 남편이 먼저 출근 전에 영어학원 새벽반에 다녔고, 나는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아직 돌이 안 된 둘째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듣고 따라 하기를 했다. 그 계획은 남편과 나만의 비밀이었고, 그렇게 몇 달을 보냈는데, 이민 절차나 비자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유학 이민 박람회가 열린다는 광고를 보고 둘째 아이는 아기 띠로 안고,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네 식구가 나란히 첫 박람회를 다녀왔다. 그 박람회에서 우리는 크게 좌절했다. 우리는 한 번도 해외에서 살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저 살고자 하면 살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박람회에서 만난 한 유학원 관계자는 요즘 성공하는 이민 전략이라고 안내하면서, 무슨 무슨 대학에 입학해서 요리과정 1년을 하고 나면 취업비자 1년짜리가 나오고, 1년 안에 취업이 되면 바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쉽게 영주권이 나온다고 했다. 그 길이 아니면 언어 문제도 있고, 어쨌든 어렵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곳인가 몇 년 살아보고 싶은 건데 듣기만 해도 답답한 비자, 영주권 단어를 들으니 거의 포기상태가 되었다.
남편에게는 한 번 지펴진 불이 쉬이 꺼지지 않았다. 남편은 흔히 말하는 이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뒤로 남편은 이민 절차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나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우리는 나의 성향과 남편의 취향을 고려하여 최종 선택지를 낙찰했다. 그것은 나를 주 신청자로 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나의 회계사 경력을 살려 회계학 1년을 공부하고 1년짜리 취업 비자가 나오면 취업을 시도해보고, 혹시라도 취업이 된다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점수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시나리오였으며, 오클랜드 (뉴질랜드의 경제 수도)는 피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첫째, 남편은 북적이는 서울살이에 지쳐있었으며, 둘째는 오클랜드 지역이 아닌 곳에서 취업이 된 경우에는 영주권 신청 시 가산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회계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말단 회계직으로 일하는 것쯤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영어 점수가 필요했다. 학교에 들어가려면 아이엘츠(IELTS) 아카데믹 버전으로 6.0 이상의 점수가 있어야만 했다. 나는 아이엘츠 공부를 시작했고, 왕년엔 영어 공부 좀 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10년간 잊어버려서 그렇지 조금만 하면 실력 나올 거라고 자신했다. 남편은 이민에 대해 한결 진지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하던 사업을 정리하면서 영어학원 종일반 프로그램에 다니고 있었다. 이제 내가 주축이 되어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스케줄이 내 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편은 다시 회화 새벽반만 다니고 낮 동안엔 내가 하루 종일 아이엘츠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남편은 비행기 표를 샀다. 2018년 1월 2일 출국. 출국 여섯 달 전 첫 아이엘츠 시험을 봤다. 그러나 점수는 처참하게도 5.0이었다. 말하기와 쓰기 영역 점수가 형편없었다. 그때였다. 영어 자신감이 떨어졌을 때는. 두 달을 더 준비하고 두 번째 시험을 봤는데 5.5점. 6.0점 얻기에 실패하여 할 수 없이 어학과정 6개월을 다니고 회계학 본 과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학교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출국 날짜가 정해지고, 학교 서류까지 진행되고 나니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지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고, 큰 아이의 학교를 알아보고, 해외 이사를 알아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관리를 시부모님께 부탁하기 위해 위임 서류를 만들어 두고, 그곳에서 집 구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곳에서 중고차 사는 곳을 알아보고, 국제 운전면허증을 받아두고, 아이들 예방접종 영문증명서를 출력해두고… 막상 살던 것 모두를 정리하는 것과 가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모두를 준비하는 것을 동시에 하려고 하니 그 양도 많고 스케줄이 꼬이는 것도 있어서 엑셀로 할 일을 쭉 정리하고 남편과 역할을 분담하여 스케줄을 관리했다. 가기 전 만날 사람들도 만나야 했고, 못 만나는 경우 전화로라도 작별을 고해야 했다.
이삿짐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 한 달 중 2주는 친정에서 2주는 시가에서 보내기로 했다. 정신없이 이주 준비하느라 진짜 가는 건지 실감도 안 났는데 이제 남은 기간 가족들과 함께 있다 보니 가슴이 뭉클해져 오고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시부모님께 처음 말씀드렸을 때, 어머님은 본인이 불을 지핀 것 같아서 말릴 수도 없다며 슬퍼하시면서도 체념하셨고, 친정 엄마께 진작에 말씀드렸었다. 무속신앙을 믿으시던 친정 엄마가 2017년 연초에 신년운세 보러 가신다며 뭐 궁금한 거 없느냐고 물으셨다.
“해외 나갈 운이 있는지 물어봐 줄래? 나가면 잘 사는지도?”
그때 친정 엄마는 펄쩍 뛰었다.
“어머머머, 너 해외 나갈 생각 있는 거야? 어디?”
점을 보고 오신 엄마는 전화로 이렇게 전하셨다.
“너네 뉴질랜드 가면 행복하게 잘 살 거래. 여기서도 행복하겠지만 거기 가면 더 행복하대. 정말 갈 생각 있는 거야? 언제 갈 건데?”
“나중에”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1년 후 헤어질 시간이 오고 말았다. 거기 가면 더 행복할 거라는데 못 붙잡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엄마는 울기만 하셨다. 연말연시를 전에 없이 살갑게 더 화기애애하고 애틋하게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형제, 자매들에게 부모님을 부탁하고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