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 도슨트 Sep 26. 2021

Disarming! | 영화 '클로저'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상용화된 지 오래다. 언제 어디서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도출할 수 있는 세상. 편리하고 신속한, 마음 편한 사회 말이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공허함은 커져만 간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갈증은 계속된다. 무엇에 대한 갈증인가? 지식에 대한? 의문 해결을 위한? 외로움 충족을 위한? 혹은 사랑을 위한 갈증인가?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인 나머지 이 갈증이 무엇에 관한 갈증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대체 우린 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가? 누구를 위해 커서를 뒤적이는가? 무엇을 위해 사랑을 하는가? 진실을 향해 다가갈수록 괴롭다. 만약 이 진실이, 내가 바라던 색깔이 아니면 어떡하지?
 
  영화 ‘클로저’는 사랑에 대한 가식을 적나라하게 걷어내는 작품이다. 낭만적인, 아련한, 애틋한 그런 판타지 소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사랑은 없다. 이런 허황된 거짓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비웃기라도 한 듯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사랑은 이기적이야!’


  영화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만큼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4명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려 서로를 속이고 갈취하는 모습을 관객들을 향해 내뱉는다.





‘네가 바라는 사랑은 네만 원하는 사랑이야!’


  영화는 4명의 인물이 각각 2쌍의 커플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물론 다정한 더블데이트는 아니다. 추잡하다면 추잡하고 쿨하다면 쿨한 그런 사랑 이야기. 사랑이라 좋게 포장하기도 힘들 만큼 그들은 자신만의 정의된 사랑이란 이름의 본능을 표출한다. ‘제발 내 욕구를 충족해 줘’ 그들은 끊임없이 목말라한다. 진실의 갈증을 참지 못하고 순간적인 감정의 갈증을 참지 못한다.



이들의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다. 이들의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혹은 틀린 것은 아닐까? 감독이 너무 극단적인 상황만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 이들의 사랑은 잘못되었다고만 보기 힘들다. (물론 눈살을 찌푸리며 어떻게 이런 게 사랑이야? 라는 의문을 가지기 쉽다.) 감독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보단 스스로 가지는 사랑에 대한 개념에 집중한다.




1) ‘댄’




  ‘댄’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을 사랑으로 추구한다. 프로필 촬영을 통해서 만난 안나와의 만남도 그렇고 영화 초반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앨리스와의 만남도 일맥상통하다. ‘댄’에게 있어 사랑이란 그리 복잡한 단계로 구성된 감정의 집합체가 아니다. ‘처음의 짜릿함’. 댄은 상대방을 향한 본인의 감정에 진실되게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댄’의 모습을 보며 그저 찌질한 바람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의 입장은 명확하다. ‘사랑’이란 복잡한 절차를 갖추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 ‘사랑’이란 짜릿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전부란 것을 ‘댄’의 언행에 투영한다.




2) ‘안나’




  안나를 쉽게 정의하자면, 비련한 운명에 빠져듦에 중독된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나는 스스로 운명에 빠져 들어간다.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변명할 뿐이다. ‘어쩔 수 없어’ 애초에 그녀에게 반항, 반대의 개념이 존재할까? 안나는 댄과의 첫만남에서도, 래리와의 첫만남에서도 그리고 추후 래리와의 결혼 후에서도 단지 ‘운명’이라는 이름 하에 급작스러운 사랑을 수용할 뿐이다. 영화는 이런 수동적인 ‘안나’의 캐릭터를 통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과연 당신이 갑작스러운 사랑에 대해 반항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도덕,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더라도 (예를 들면 간통, 불륜, 바람으로 지칭되는 행위들) 과연 당신은 그 순간 도덕적 잣대를 통해 이에 반항할 수 있는가? 라고 말이다.




3) ‘래리’




  래리의 직업은 의사다. 명확한 진찰을 통해 정확한 정답을 도출하는 래리의 성격을 무엇보다 잘 투영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흔히들 ‘눈만 마주쳐도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다는 표현. 하지만 래리는 그러지 못하다. 래리는 그런 감정적인 유대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 래리는 순수히 ‘언어’적, 시각적 체계를 통해 명확히 인풋과 아웃풋의 메커니즘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극 초반 ‘댄’에게 인터넷 채팅에서 속은 것, 결혼 후 안나의 외도 고백에서 정확한 묘사를 요구한 것, 스트립 클럽에서 ‘앨리스’에게 지속적으로 신체의 특정 부위를 보여주길 요구한 것 모두 일맥상통하다. 이러한 모습들은 결국 ‘래리’에게 있어 ‘사랑’이란 명확한 언어적, 시각적 요소로 표현이 가능해야 함을 나타낸다.




4) ‘앨리스’





극중 댄은 앨리스를 이렇게 표현한다.


Disarming!

‘형용사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마음(화/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



  감독은 앞서 3가지 사랑의 유형에 대해 설명했고 이에 대한 일종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앨리스. 감독은 관객들(그리고 극 중 앨리스의 주변 인물들)에게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연 사랑은 무엇일까? 특정 지을 수 있는 것인가? 해답이 있는 것인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이 추구하는 사랑은 누군가에겐 폭력이지 않을까?”



  앨리스는 관객뿐만 아니라 댄, 안나 그리고 래리에게 일종의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한다. 각자가 추구하는 사랑이 과연 언제나 정답인 것인지, 만약 상대방이 본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해 보기를 만드는 공백. 앨리스에게 사랑이란 그저 서로가 함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일 뿐, 이름도 출신도 직업도 중요치 않다. 앨리스는 자신의 직업처럼 허울과 가식의 옷들을 훌훌 벗어던지어 있는 그대로의 ‘사랑’에 관해 논하기만을 원했다.




때론 잠깐의 첫인상과 달리, 멀리서 바라봤던 것과 달리 막상 가까이하면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런 상황이 그 사람의 문제인 것일까?



“처음 봤을 땐 착해 보였는데”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단순히 본인이 원했던 모습만을 타인에게 강요한 것은 아닐까? 영화 ‘클로저’는 본인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제한하는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당신은 당황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사랑과는 너무 다른데?” “이게 어떻게 사랑이야?”

뭐가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것인가? 자 다 같이 잠시 숨을 고르고 본인에게 외쳐보자.

Disarming!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아래 월간 도슨트 인스타 계정을 통해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https://instagram.com/monthly_docent?igshid=1c09qpgfuv 


작가의 이전글 셜록홈즈가 들춰낸 인간의 공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