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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살이 Jul 03. 2021

한 노령 이용자의 남다른 도서관 이용법!

'정수기' 관련 기사에 소환된 오래전 기억

 얼마 전, '은행에서 500ml 생수병으로 정수기 물을 받아먹다가 제지당했다'는 커뮤니티의 (캡처한) 글을 봤습니다. 당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수병에 물을 받다가 은행 보안 직원에게 제지당했고, 보안 직원은 '정수기 옆에 비치된 종이컵에 물을 받아먹으라'는 안내와 '저희도 물을 사는 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위키트리 기사(“은행에서 생수병에 물 따라 마시면 안 되나요?” 갑론을박 벌어진 사연) : https://www.wikitree.co.kr/articles/663295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은행 보안 직원은 왜 저렇게까지 했을까? 500ml 생수병에 물을 받아 마시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입을 댄 생수병을 정수기 추출구 주변에 갖다 대면 감염병 예방 수칙에 어긋나서 그랬나? 근데 왜 '저희도 돈 주고 사는 물'이라는 말을 덧붙였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도서관 이용자 한 분이 문뜩 떠올랐습니다. 제가 그분을 본 것은 A도서관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A도서관을 조금 설명하자면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해당 지역의 대표 도서관으로 나름의 역사와 역할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오랜 역사와 함께 건물도 오래되고 위치도 주택가 인근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습니다. 이용자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인근 주민들과 상인, 회사원, 초등학생 등 꾸준히 오가는 도서관이었습니다.


 '문뜩 떠오른' 그분은 도서관 맞은편 다세대 주택에 사시는 분으로 연세가 많아 보였습니다. 백발에 거동도 굉장히 느릿느릿하셨는데 아마 8~90대 정도 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깔끔한 옷차림에 인상도 선하셨습니다. 가끔 눈을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진 않았지만 거의 매일 도서관에 방문하셨습니다. 커다란 물통 몇 개를 넣은 가방과 함께 말이죠!


 제가 근무한 안내데스크는 1층에 있었는데 공간이 전체적으로 잘 보이는 위치라 사람들의 출입과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안내데스크의 위치가 다 그렇지만요!ㅋㅋ) 그 어르신은 매번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와 제일 먼저 정수기 앞으로 가, 가져온 물통 가방을 옆에 내려두고, 물통을 꺼내 한 병 한 병 차곡차곡! 정수기 물을 담으셨습니다. 다행히 도서관 정수기가 물통 정수기가 아닌 직수형이라 그분이 물을 몇 리터 담아 가셔도 거뜬했습니다. 어떤 날은 김치통에 물을 담아 가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은 '할머니, 이 많은 물은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세요?' 묻고 싶었지만 감히 여쭤볼 용기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물을 담아가시는 거 보면 요리하실 때도 정수기 물을 사용하시는 게 아닐까 혼자 상상했습니다.


 그렇게 가득 채운 물통 가방을 키도 작으시고 몸집도 왜소하신 분이 덤덤히 들고 가시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루틴이 더 있었는데 바로 양치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정수기 물을 다 받고 나면 화장실에서 양치를 시작했습니다. 직원들도 점심을 먹고 나면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니 할머니의 양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왜 매일 아침 여기서 양치를 하시지?' 의문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저희 집 화장실도 아니니 제가 기분 나빠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독 도서관 화장실에서 양치를 해야 상쾌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참기 힘들었던 부분은 양치를 하시며 내는 '소리'였습니다. 도서관 건물이 크지 않고 오래되다 보니 1층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소리가 잘 들리는 안타까운 구조였습니다. 더군다나 도서관에 사람이 없어 아주 조용할 때는 화장실에서 나는 작은 방귀소리까지 들려 듣는 제가 다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현재는 화장실 리모델링을 해서 잘 안 들리는 거 같더라고요 ㅋㅋ)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가 양치를 시작하면 그 소리가 생중계되었습니다. 다른 소리는 다 들을만했는데 양치를 하며 내는 '크으윽카아악-퉷!'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저는 따라 할 수조차 없을 만큼 날카롭고 거칠었으며, 마치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우렁찬 소리였습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노쇠하신 어르신께서 저런 소리를 어떻게 내시는 건지, 저렇게 하면 목이 괜찮으신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약간은 기괴한 그 소리를 다른 직원들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인상을 소유하셨고 크게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니, 별다른 주의나 안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 누구도 다가가 말을 건넨 적은 없었습니다.


 화장실에서 할머니를 마주친 한 직원 말에 따르면 세수도 여기서 하신다고 하더군요. 목에 두른 수건의 용도가 얼굴을 닦기 위함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고시생 이용자가 도서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세수 정도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직원 말에 의하면 할머니의 이런 생활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절약하셔서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누구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진짜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 동안 열심히 관찰하다가 얼마 못 가 그만두었습니다.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저는 가끔 그 소리가 유난히 듣기 힘들 때가 있었고, 신경 쓰면 쓸수록 저만 괴로울 뿐이었습니다. '공공재는 모두의 것이니 지나친 사적 용도는 올바르지 않다'는 상투적인 생각에 할머니의 행동을 혼자 비판도 해봤지만 (속으로요!) 세상의 모든 일을 제 머리로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심판할 자격도 없으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물을 뜨시고 화장실로 가시면 자료실을 살피러 잠시 피하곤 했습니다. 괜한 사람을 미워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혹시, 은행 보안 직원이 그동안 은행에서 근무하며 겪은 놀라운 광경(?)때문에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어떠한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다 보면 한 순간에 급발진할 때가 있고 (보안 직원이 급발진했다는 건 아닙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물은 정수기 옆에 붙어 있는 종이컵에 드시도록 안내하라'는 기관의 지시에 본인도 어쩔 수 없이 안내한 것이지 않았을까? 그러다 내부적으로 나눈 말들이 그 상황에 튀어나온 건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네요!


 끝으로 더는 A도서관의 직원이 아니라 할머니의 소식은 모르지만, 여전히 물통 가방을 거뜬히 드시는지, 양치는 잘하고 계신지 갑자기 궁금하네요. 한 때는 미워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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