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서살이 Oct 27. 2021

걸어서 제주 한 바퀴! 2

두 번째 이야기, 치열하게 적응한 첫 주!


1일 차

 제주공항에 집합해 9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첫날이라 설렘과 기대로 입꼬리가 씰룩씰룩거렸다. 하지만 3시간 정도 걷고 나니 발바닥과 다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6.5kg밖에 안 되는 배낭이었지만 벗어던지고 싶었다. 9월 말 한낮의 제주는 땀이 주룩주룩 흐를 만큼 더웠다. 더위와 다리 통증으로 입맛이 싹 사라졌다. 좋아하는 국밥을 거절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혼자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심신을 달랬다. 하지만 오후 6시가 되니 슬슬 한계가 찾아왔다. 두 발이 짝짝이인지 오른쪽 새끼발가락만 등산화에 눌려 유난히 아팠고 무릎과 고관절도 집중적으로 쑤셨다. '아프다'고 말할 기력조차 없었던 첫날은 그렇게 30km를 걸었고 어두워진 후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제발 내방'이길 바라며 진통소염제와 근이완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났는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첫날 걸은 올레길 18코스(애기업은돌 주변)



2일 차

 오늘 걸을 거리는 총 37km다. 어제보다 많다. (젠장!) 아침 7시부터 걸었다. 약을 먹고 자서 그런지 약간의 뻐근한 느낌만 있고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심리는 더 불안했다. 고통스러운 첫 날을 겪고 나니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며 하루 종일 의심과 확신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다. 자신과의 싸움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포기할까?' 묻는 자아와 '어떻게든 해내!'라고 밀어붙이는 자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길을 걷겠다고 한 거지?', '이 고통 뒤에 깨닫는 것이 정말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은 찾을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걷는 것뿐이었다. 아침에 누군가 나에게 건넨 스틱 하나로 힘든 하루를 간신히 버텼다. 다리 하나를 더 얻은 기분이라 오전 내내 기뻤는데 걷기가 끝나갈 무렵 스틱을 잡은 오른손도 아파왔다. 200g 정도밖에 안 되는 가벼운 스틱이었는데 그 무게도 무거웠다. (스틱을 배낭에 메달면 되는데 당시는 그런 생각조차 못했다. 바보같이..)


 나는 '같이 걷기' 대신 '혼자 걷는 것'을 지향했다. 함께 걸으며 누리는 즐거움과 장점도 많지만 걷기도 힘든데 상대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듣고 호응하는 일이 내게는 버거웠다. 사람에 따라서는 쉬지 않고 말하는 유형도 있고 간간이 말하는 유형도 있지만 내 몸이 온전치 않으니 상호교류에 정성을 쏟기가 어려웠다. 외로울지라도 혼자 걸으며 몸 상태를 확인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혼자서 길도 찾고 (어두운 숲길을 걷거나 할 때) 두려움도 이겨내고 여러 선택지 앞에서 옳은 판단까지 하느라 1인 다역을 해야 했지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마음만은 편안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둘째 날은 내 방식을 하나씩 찾아가며 최종 목적지에 (겨우) 도착했다.


오전 10시 30분쯤 걸은 올레길 19코스(무서웠던 숲 길)



3일 차

 아침 8시 30분, 비 예보가 있었는데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시골 동네를 가로질러 가는 올레길 덕분에 싱그러운 밭 풍경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그늘이 없어 땀이 비처럼 흘렀다. 대부분의 시골길은 시멘트로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 오히려 걷기(정확히 말하면 발과 다리 통증)에는 안 좋았다. 장시간 걷다 보니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다져진 길보다 흙길이나 자갈길이 훨씬 발의 피로도가 낮다는 걸 몸소 느꼈다. 그래도 종달리 시골길에서 만난 동네 아저씨가 '이렇게 계속 걸어 다니느냐'라고 물어 '네, 맞아요!' 대답했더니 '대단하네~'라고 하셨다. 자동으로 나오는 추임새나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대단하네'라는 그 한 마디에 감사하고 뿌듯하고 기쁘고 없던 힘마저 솟았다. "아자아자! 더 열심히 걸어야지!"


올레길 21코스 (걷기에는 아픈 시멘트길이지만 아름다운 구좌읍 시골 풍경)


 평소 아무리 걸어도 무릎이 아픈 적이 없어서 무릎보호대를 준비해 가지 않았는데, 장시간 걸으니 무릎 통증이란 게 내게도 찾아왔다. 다행히 무릎보호대를 챙겨 온 동지 중 한 명이 본인은 필요 없다며 내게 빌려주었다. 무릎보호대 효과는 엄청났다. 보호대를 착용한 후로는 무릎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새끼발가락이 여전히 아팠고 결국 새끼발톱에 피멍이 들었다. 배낭 때문인지 승모근도 뻣뻣해지고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하반신 전체에 얕은 근육통도 찾아왔다. 배낭 매장에 방문했을 때, 사장님께서 '나중에는 근육통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거예요'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나는 이 통증이 전혀 그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걷다가 뜨거워진 발바닥을 식히려 제주 바닷물에 발을 담갔더니 달궈진 팬을 물에 넣을 때 나는 '치이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앞선 이틀의 고행 탓인지 오늘 걸은 20km는 적당하게 느껴졌다. 1, 2일 차 거리도 이 정도였다면 더욱더 잘 적응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치이익~”


 

4일 차

 오전 7 30, 우도행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커다란 무지개를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무지개를  적은 처음이다. 게다가 주노남보 선명히 보여서 신기했다. 출발한  10 만에 우도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해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우도항에서 산호초 해변을 따라 걷다가 우도등대를 향해 계속 걸었다. 동네 골목에서 하얀 개를 만났는데 목줄이 없었다. 나를 향해 달려올  조금 무서웠지만 신발 냄새를 킁킁 맡더니 허벅지에 앞발을 올리고는 꼬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아마 심심했던 찰나에 나를 만나 반가웠나 보다!


우도에서 만난 동네 강아지


 우도등대에서 바라본 우도 풍경은 평화로웠다. 작은 섬을 둘러싼 거대하고 고요한 바다가 오히려 이 섬을 지켜주는 듯했다. 올레길을 따라 우도 한 바퀴를 걸으니 대략 4시간이 걸렸다. 우도항 근처에 다다랐을 때 파출소가 보여 '평화로운 이 작은 섬에도 범죄가 있을까?' 궁금했다. 우도항 근처에 계신 경찰분께 직접 물어보았는데 우도에는 호객행위와 분실물 문제가 가장 많다고 친절히 답해주셨다. 여행 온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물건을 많이 잃어버리고는 택배를 빨리 보내라느니 어쩌라느니.. 온갖 요구를 한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도서관 이용자 중에도 본인 과오로 벌어진 일을 직원에게 짜증 내며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올레길 1-1 코스(우도봉)에서 바라본 우도 풍경


 점심때쯤 우도를 나와 알오름을 올랐다. 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과 우도는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초록이 무성한 아기자기한 마을 위로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까지 곁들인 그곳의 풍경을 보니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알오름을 내려와 목화 휴게소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안경알에 빗물이 떨어져 시야가 울퉁불퉁했고 모자챙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나 말고도 빨랫줄에 걸린 오징어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체 쪼르륵 걸려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온갖 매연과 미세먼지, 산성비로 절었을 오징어를 보니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화휴게소에서 다른 참가자가 사준 시원한 맥주와 반건조 오징어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맥반석에 구워 담백하고 쫄깃쫄깃한 오징어 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올레길 1코스(알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우도와 성산일출봉



5일 차

 아침 7시, 날씨가 굉장히 맑았다. 광치기 해변까지 걸어가는데 '오늘 날씨는 장난 아니겠는데' 싶었다. 올레길 3코스에는 오름을 오르는 A코스와 해안도로를 걷는 B코스가 있어 '나는 산과 바다 중 어디를 더 좋아하지?' 고민했지만 오르막이 없는 해안도로를 선택했다. 내리쬐는 햇빛과 딱딱한 아스팔트를 걸으니 1시간 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힘든데 배까지 고팠다. 아침식사가 가능한 식당으로 빨려 들어가 해물라면에 전복죽, 전복뚝배기를 4명이서 후루룩 먹었다. 특별히 맛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남김없이 먹었다. 식당을 나와 곧바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계속 든 생각은 '생각보다 아스팔트나 시멘트길이 많네... 발 아프다!'였다.


아스팔트 길


 오후 3시쯤 신청목장에 도착했다. 드넓은 잔디밭에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정면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소 팔자가 너무도 부러웠다!) 멋있는 풍경을 보니 피폐해진 내 마음에 위안이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얻은 이너피스를 조금 더 누리고자 목장이 내려다 보이는 2층 카페에서 1시간을 머물렀다.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니 각자의 방식으로 그곳을 즐기고 있었다.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몇 바퀴씩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 4시, 그때까지도 뜨거운 햇살은 계속됐고 걸으니 몸은 금방 달아올랐다. 그래도 마음만은 여전히 시원했다.


카페 2층에서 바라본 신청목장(올레길 3-A 코스)



 도로 바닥에 펼쳐놓고 말리는 미역을 보면 머리가 혼란스럽다. 혹시 제주에서 먹은 미역국의 미역들이 이렇게 말린 건가? 이렇게 말리다가 차가 밟고 가면 어떡하지? 혹시 아무나 가져가라고 여기다 놓은 건가? 어쨌든 먹고 안 죽으니까 여기다 말리는 거겠지? 등등. 나로서는 답 할 수 없는 많은 의문들이 스쳐 지나간다.


자연건조 중인 도로 위 미역

 

 온종일 걷다가 도착한 표선 해수욕장에는 아이들과 놀러 온 가족들도 많고 여기저기 서핑객 무리도 보였다. 평평한 백사장 위로 얕은 파도가 살금살금 출렁거렸다. 곧바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파도를 맞으며 모래 위를 걸었다. 하루 종일 고생한 발바닥이 물과 모래로 마사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모래 속으로 발이 푹푹 빠져 다리에는 두배로 힘을 줘야 했지만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신나는 백사장 걷기가 끝나고 10분 정도 숙소를 더 걸어가야 하는데 계속해서 맨발로 걸었다. 길바닥 작은 돌멩이들이 발바닥을 콕콕 찌르고 아스팔트는 여전히 뜨끈뜨끈했지만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목적지 도착! 오늘 하루 끝!!)


올레길 3코스(표선 해수욕장)



6일 차

 아침 7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나름 이른 아침이었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해안가를 산책하는 여행객들이 종종 보였다. 부지런한 햇살은 아침부터 뜨거웠고 등지고 걸어 다행이었다. 올레길 5코스(큰엉해안경승지 주변) 해안 숲 길을 한참 걷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가며 길 중앙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도대체 뭘 배경으로 찍는 거지?' 의아해하며 지나쳤는데 나중에 다른 참가자들의 사진을 보고 번뜩 생각이 났다. 그곳이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봤던 한반도 지형 포토존이었다는 걸! (앗! 아까비...)


 오늘 걸은 올레길 4코스와 5코스 길이를 합치면 약 32km다. 며칠 내내 오장육부가 깜짝 놀랄 만큼 장거리를 걸었더니 살기 위해 몸은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6일 차가 되니 나름의 걷기 노하우가 생기기 시작했고 온몸에 자리 잡았던 근육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제일 큰 변화는 ‘어떻게든 걷게 되겠지!'라는 확신이었다. 어느새 몸과 정신이 적응을 하고 긴장감이 줄은 탓인지 저녁을 먹자마자 9시에 잠들었다. (일기도 못 쓰고..)



올레길 5코스(큰엉 바위 근처)



7일 차

 오전 8시 30분, 오늘도 햇빛은 따사롭다. 늦잠을 자고 싶은 일요일 아침에도 삼삼오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시간부터 올레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행 가서도 부지런한 듯!) 오늘은 자전거 타는 여행객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헬로',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등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는 게 멋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만약 올레길 완주를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과 시도했다면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친밀하지 않은 관계가 '덥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 가겠어!'와 같은 투정을 꿀떡꿀떡 삼키게 해 줬다. 쉽게 징징거릴 수 없는 적당한 거리가 '아픈데 버스 타고 갈래?'와 같은 유혹의 손길을 내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의욕을 북돋아도 부족한 판국에 내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거나 의지를 무너뜨리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올레길 6코스(보목동 주변)에서 바라본 섶섬





                                                                                                            3편에서 계속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걸어서 제주 한 바퀴!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