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자 대체 사서
사서자격증을 발급받은 지 이틀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35살 무경력자가 작은도서관 1인 사서 자리에 육아휴직자 대체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사서로 취업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일자리 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문헌정보학 전공을 늦게 시작했다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천천히 가보자는 생각으로 주말 도서관 자료실 보조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단시간 근로자는 사서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아 가정주부와 대학생 지원자들이 몰려 경쟁이 치열했다. 단시간 자료실 보조자 채용도 쉽지 않다는 사실에 서글펐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한동안 직장에 매여있지 않다 보니 고정적이던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온전한 내 시간이 생겼다. 오전에 점자를 배우기로 했다. 어릴 적 <헬렌 켈러>를 읽으며 점자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마땅히 배울 곳이 없었다. 시각장애인 사회복지시설인 부천 해밀도서관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점자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오전 시간에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직장인은 수강할 수 없다. 오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점자를 드디어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점자를 쉽게 생각했다. 한글처럼 자음과 모음만 점자로 배우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수많은 약자가 존재했다. 수업 중에 점역교정사의 설명에 집중하지 않으면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한다. 수업을 듣는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하던 것을 멈추고 중간에 잠깐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전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 받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같은 번호로 한 번 더 전화가 왔다. 스팸 전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수업이 끝난 후 전화를 해봤다. 몇 주 전에 입사지원서를 냈던 기관이었다. 면접 일정 관련으로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아 면접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통보받았다. 면접 기회를 놓치게 되어 매우 아쉬웠지만 내 자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점자 공부에 매진하기로 했다.
며칠 뒤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면접을 보러 올 수 있냐고 물었다. 홈페이지에 합격자 공고까지 올린 상태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니 몹시 의아했다. 합격자 발표까지 난 것으로 아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게 무슨 이야기냐고 되물었더니 수화기 너머로 매우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담당자는 최종합격자가 며칠 만에 퇴사하게 되어 다시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퇴사 사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개인 사정으로 다리가 아파서 퇴사하게 되었다는 다소 의문스러운 답변을 듣게 되었다. 찝찝했으나 나이 많은 신입 구직자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기관에서 면접 일정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채용이 시급해 보였으나 나는 이미 마음을 비운 곳이라 그다지 급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 면접을 보기로 일정을 잡고 면접장까지 가는 교통편을 검색했다. 테크노파크 단지에 위치한 복지관 내 작은도서관으로 네이버 길 찾기를 활용해 검색해보니 우리 집에서 4.8km 거리에 자차로 14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자가용이 없는 뚜벅이였으므로 다시 대중교통편을 검색했다. 버스를 한 번 환승해야 하는 여러 경로가 나왔고 20~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제시되었지만 버스 환승이라는 게 기다리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네이버의 추천경로는 아니었지만 좌석버스로 한 번에 근처까지 간 다음 도보로 걷는 경로를 선택하기로 했다.
면접에 대비하고자 기관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는데 운영 프로그램이나 진행사업 등 딱히 산출되는 결과물이 없었다. 무경력자로 입사를 하게 되어도 진행사업이 많지 않아 신입이 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면접일이 되었다. 오후 2시에 면접을 보기로 했다. 면접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야 할 것 같아 일찍 집을 나섰다. 좌석버스는 일반 버스보다 배차 간격이 길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11분 정도 다섯 정거장만 지나면 되기 때문에 면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벨을 눌렀음에도 기사 아저씨께서 정거장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덕분에 한 정거장 더 가 고가를 지나게 되었고 부천이 아닌 인천에서 내리게 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벨 누른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며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를 하셨다. 무척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테크노파크 정거장은 출퇴근 시간 이외에는 승하차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가 정거장을 그냥 지나쳐 간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반대편 버스 운전자에게 전화로 미리 연락을 취해 사정을 이야기해놓을 테니 신호등을 건너가 카드를 찍지 말고 같은 버스를 타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배차 간격이 길어 기다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기관에 전화를 걸어 버스를 잘못 타서 면접 시간보다 조금 늦을 거 같다고 미리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관은 여러 가지로 나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시의 경계인 외곽지역이라 지나가는 택시가 없었다. 카카오 택시 앱을 활용하여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 10분 정도 기다렸더니 택시가 도착했는데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황당했다. 카카오 택시가 150m 앞에 있는 주유소에서 멈췄다. 앱에 제시된 기사님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다기에 내가 찾아가겠다고 하고 걸어서 힘겹게 택시를 탔다. 허허벌판에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못 찾아서 지나쳐갔다고 하니 오늘은 일이 잘 풀릴 거 같지 않았다. 택시 기사님도 조금 황당해하는 거 같았다. 이 지역은 외곽이라 택시를 잡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여기서 택시를 타게 된 것인지를 궁금해하길래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설명해야 했다. 사실은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인데 버스에서 버스 기사님이 내려주지 않았고 택시를 잡았는데 택시 기사님이 태워주지 않아 면접 시간에 늦을 거 같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기사님께서 다행히 속도를 많이 내주셔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관에서는 한 명뿐인 면접자가 늦는다고 전화를 하니 체념했다가 면접장에 도착한 나를 보고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면접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면접자가 한 명뿐이라 그런지 다소 형식적이라고 느껴졌다. 면접 장소에서 나오자마자 급여가 적을 거라며 미리 금액도 알려주었고 바로 입사가 가능한지를 묻는 것으로 보아 나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 같았다. 기관 기념품을 받고 복지관을 나왔다. 같은 경로로 집에 돌아가자니 버스가 정거장에서 나를 태워줄 거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시내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한참을 돌아가는 경로로 귀가했다. 매우 박진감 넘치는 하루였다. 집에 돌아간 후 몇 시간 뒤 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있는 사서가 내일 퇴사하기 때문에 빨리 인수인계를 받아야 할 거 같은데 내일부터 출근이 가능한지 물었다.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2021년 3월 10일부터 2022년 1월 31일까지 육아휴직자 대체 사서로 테크노파크 단지에 위치한 작은도서관에 출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