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쓰레기 소각장을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예전부터 방문해보고 싶었던 기관이었다. 위치가 부천 외곽이라 접근성이 떨어져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위치의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되어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테크노파크 인근에는 파스타 가게가 없어 찾아보던 중에 아트벙커 안에 CAFE & RESTO라는 파스타 가게가 있어 전시를 관람하고 식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문 전에 미리 메뉴판을 보고 싶어 아트벙커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를 방문했더니 아쉽게 코로나19로 식당 운영이 중단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남는 시간에 아트벙커에 방문해야 했고 현재까지 총 세 개의 전시를 관람했다.
⓵ 양정욱 <대화의 풍경:우리는 가끔씩 휘어지던 말을 했다.>
이 전시는 내가 아트벙커에서 처음으로 관람한 전시이다. 거미같이 생긴 모기 조형물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가니 테크노파크 직원으로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주차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트벙커 내부에는 관람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지하가 아님에도 건물 내부가 마치 지하실처럼 습하고 시원했다. 처음 방문한 기관이다 보니 내부가 낯설어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팸플릿을 펼쳐서 읽어보았다. 쓰레기 소각장을 개조하기 이전에 어떤 시설물이 어떤 용도로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었다. 현재는 쓰레기 소각장의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동안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던 터라 그 냄새를 완전히 벗어내기는 힘들었는지 약간의 악취가 났다.
내부에 여러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전시를 진행할 수 있는 것 같았는데 현재는 하나의 전시만 진행 중이었다. 과거 쓰레기 저장조였던 넓고 높은 공간에 전시물을 설치했는데 작가가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팸플릿에 제시된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묘사하였다는데 해설을 읽고 설치물을 바라보아도 무슨 대화를 나누는 모습인지를 명확하게 알기 힘들었다.
설치 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일반인의 시각에서 바라봐서 그런지 전시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을 거라는 사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철골 구조물에 닻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둘러놓고 계속 움직이게 해 놓았는데 고정된 물체가 아닌 움직이는 구조물로 표현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주제가 대화의 풍경이라 대화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했을 거로 추측하지만 완전하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을 보다 보니 대학 시절 미술대학 졸업 작품 전시회를 관람하던 때가 떠올랐다. 일부러 미대까지 찾아가서 관람한 것은 아니었고 학교 메인 건물 1층 로비에 졸업 작품을 전시했던 터라 로비를 지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대형 설치물들이 로비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저렇게 큰 설치품들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미술에 무지했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예술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눈길이 갔던 작품이 있었다. 전시품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투명 아크릴에 4~5명의 사람이 일렬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작품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설치 미술로 표현한다면 그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가의 작품 의도가 그 뜻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으나 관람객의 관장에서 내가 받아들인 의미는 그러했다. 아마도 그때 졸업을 앞두고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은데 그 작품을 보면서 공감과 위로를 느꼈던 것 같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관람하면서 과거에 봤던 작품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⓶ 양정욱, 오태원, 진달래&박우혁 그룹 전시 <CIRCLES IN A CIRCLE>
아트벙커에서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알아보려 들어갔다가 새로운 전시를 진행한다는 공지를 보고 관람 예약을 하게 된 전시이다. 지난번 양정욱 작가의 전시는 관람을 했던 터라 오태원, 진달래&박우혁 작가의 작품이 궁금했다. 점심을 서둘러 먹고 사전에 예약한 시간에 아트벙커에 방문했다. 내 앞에 두 명의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현관에서 QR 체크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박물관도 전시품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기획 전시를 운영하게 되면 관람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무더운 밖의 날씨와는 상반되게 건물 내부는 에어컨을 풀가동해 매우 쾌적하고 시원했다. 양정욱 작가의 작품은 앞선 전시처럼 매우 큰 구조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구조물의 움직일 때마다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전체적으로 대형 설치물에 움직임을 주는 것으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데 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나에게는 조금 난해했다.
현관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나머지 두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진달래, 박우혁 작가의 Across the Universe 였다. 큰 원형 볼 2개가 복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전시물을 향해 걸어가다 보니 오태원 작가의 화려한 물방울 작품이 눈에 띄었다. 먼저 전시를 관람하던 두 명의 또 다른 연인이 그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진달래, 박우혁 작가의 작품 해설을 읽어보았다. 전시 월에 제시된 글에는 NASA와 존 레논이 등장하는데 해설을 읽지 않고 혼자서는 작가의 작품 제작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엄청난 크기의 볼을 감상한 이후 다시 오태원 작가의 작품으로 향했다. 알록달록한 물방울들을 통유리로 분리된 외부 공간에 설치해 놓아 예쁘기는 한데 이 작품의 의도 역시 알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단체 관람을 오거나 어린아이들이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매우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시품들을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남겼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문화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했다.
⓷ 오순미 초대전 <바람이 불지 않는 거울연못>
아트벙커에서 새로운 전시를 진행하는지 확인 차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알게 된 전시이다. 이전에 전시를 진행하지 않았던 새로운 작가여서 관심이 갔다. 전시 소개에 제시된 글을 통해 미디어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미디어 아트라고 하니 백남준이 떠올랐다. 백남준은 시대를 앞선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지만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대중에 불과한 나에게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예술품에 불과했다. 미디어 아트전시라고 하니 난해하게 느껴져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전시 기간이 약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빨리 관람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전예약을 하고 서둘러 다녀왔다.
1층에는 이전에 관람했던 그룹 전시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점심시간이 35분밖에 남지 않아 여유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아트벙커 내부는 전체적으로 한산했고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 두 분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닥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 보니 ‘봉인된 시간_과거’ 작품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손으로 밀어보니 열려서 들어가게 되었다.
전시실 내부는 화려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 밝은 클럽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날씨가 맑았다면 전시 관람객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핫한 감성이 드는 공간이었다. 관람객이 혼자라 마음껏 사진을 찍었는데 사방이 온통 거울이라 한 장의 사진에 많게는 10명의 내가 찍혔다. 혼자 놀이동산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밖의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별도의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색찬란한 조명이 화려하면서도 차분하게 내려앉아 그곳에서 한 시간 넘게 머물러 사색에 잠기고 싶었지만 나는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낸 직장인이었기에 다른 곳을 둘러보기 위해 문을 나섰다.
다음 전시실인 ‘불안정한 평정’은 입구가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커튼을 살짝 들춰보니 넓은 공간 천장 한가운데에 노래방 미러볼 같은 조명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알 수 없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이 공간을 관객이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 같아 전시 월의 글을 읽어 보았다. 관객이 조명 아래에 있는 패널에 올라가 발로 수평을 맞추면 조명이 꺼지고 적막에 휩싸여 진정한 평정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는 전시물이라는 설명을 읽으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얽혀있어 복잡했는데 이 공간이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막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위치한 패널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넓은 공간의 전시실이었다. 공간 안에는 조명 이외의 어떤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조명의 빛이 온 벽을 감싸며 돌아가고 있었다. 바닥의 패널을 밟았더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패널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가 너무 휑해서 살짝 무서웠다. 넓고 폐쇄된 어두운 공간에 오롯이 나 혼자 서 있었다. 거울이 없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패널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패널이 한쪽으로 아예 기울어져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한참 동안 노력한 끝에 겨우 수평을 맞출 수 있었다. 전시 설명에서 읽은 대로 수평을 맞추고 몇 초가 지난 뒤 조명이 꺼졌다. 조명이 켜져 있어도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조명이 꺼지고 나니 완전한 암흑 속에 내가 갇힌 느낌이 들었다. 마음의 평정이 들기보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수평을 다시 기울이면 조명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술가의 의도대로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오래 지나지 않아 암막 커튼 쪽에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 패널에서 내려가다가 수평이 깨졌다. 조명이 켜졌고 소리가 나는 쪽을 확인해 봤더니 건물을 둘러보던 어르신 중 한 분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그분도 나를 보고 많이 놀랐는지 황급히 커튼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에서 다시 집중하고 패널의 수평을 맞춰 암흑 속에 빠져보아도 마음의 평안보다는 불안과 공포가 커지는 기분이 들어 공간 사진 촬영만 한 뒤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화살표를 따라 가보니 <15분의 자유를 팝니다>라는 제목의 상자가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째깍거리는 초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15분의 자유가 적힌 상자를 만 원에 판매한다는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잠깐의 여유도 없을 정도로 바쁠 때면 돈으로 시간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에게 15분의 자유를 판매하기 위해 기획된 굿즈라고 한다. 굿즈의 기획 의도가 마음에 들어 구매하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불필요한 기념품은 잘 사지 않는다. 순간의 기분에 휩싸여 구매한 물건들이 방 한 켠의 작은 공간을 차지한 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잊혔다가 몇 년 뒤 서랍을 정리하면서 처분한 적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구매에 앞서 한 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서 구매한 스탬프 스티커를 떠올렸다. 성냥갑만 한 크기의 종이상자 안에 28개의 스티커가 들어 있는 것을 팔천 원을 주고 샀다. 한국에서 다시 보기 힘든 전시라 기념품이라도 사서 쟁여놓아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념품 가게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히 구매할 물건이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스탬프 스티커는 손편지를 쓸 일이 있다면 씰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구매했는데 전시 이후 한 번도 꺼내 보지 않다가 구매 가격을 확인해보려고 서랍에서 처음 꺼내 보았다.
이처럼 활용할 일이 거의 없고 공간만 차지하다가 버려질 굿즈를 구매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한참 고민하다가 건전지가 들어있어 타이머로 작동이 가능한 굿즈를 만 원에 구매할 수 있다면 스탬프 스티커보다 합리적인 소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한 달 안에 이 전시를 다시 보러 또 방문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구매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구매할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구매하기로 했다.
구매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 번호로 전화를 해달라는 안내문대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고 몇 분 뒤 직원이 내려왔다. 원하는 상자 번호가 있냐고 묻길래 딱히 없다고 했더니 창고에서 포장된 새것으로 가져다준다고 해서 새 물건을 받았다. 상자 안의 설명서에는 <시간을 파는 남자>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며 작가의 기획 의도와 15분의 시간 계산 공식을 기재해 놓았는데 해당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미술가가 문학 작품을 읽고 영감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큰 화물차들이 지나다니는 신호등을 건너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기념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타이머에 맞춰 째깍째깍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키는 물건을 작동시켜볼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도서관 운영 시간 전에 <15분의 자유>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 후 15분 동안 명상을 했다. 명상이라고 해서 딱히 정해진 어떤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그냥 15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몇 분 앉아있어 보니 바쁜 마음이 사라지면서 한결 차분해졌고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온전히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