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어느 날, 문득 홍콩이 가고 싶어졌다. 야경이 멋있어서가 표면적인 이유였고, 해야 할 일도 신경 쓸 일도 많아서 심리적으로 도피처가 필요했던 게 진짜 이유였다. 좋게 얘기하면 실행력이 좋고, 나쁘게 얘기하면 충동적인 나는 그 길로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숙소 예약을 했다. 홍콩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든 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그러나 여행을 가려면, 그것도 여자 혼자 해외여행을 가려면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었다. 바로 저녁 8시만 되면 들어오라고 전화하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엄마. 엄마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당시 한창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지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엄마이기에, 막 외국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친구가 좋은 핑계가 되지 싶었다.
"나 Y 집에 며칠 다녀올게. 논문 때문에 물어볼 것도 많고 도움받을 것도 많아"
당시 그 친구는 대구에 있었고, 덕분에 외박도, 큰 짐가방을 끌고 집을 나서는 것도 한치의 의심 없이 통과했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다. 홍콩으로.
나름 가고 싶은 곳들과 그곳으로 가는 교통 편들, 먹거리, 쇼핑 목록 등등 완벽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뭐든 계획대로 되면 재미없는 법.
비행기표값을 절약하려고 예매한 저가 항공은 새벽 1시에 첵랍콕 국제공항에 내려주었고, 분명 공항버스를 타고 열일곱 정거장만 가면 도착한다던 침사추이의 숙소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깊은 밤 홍콩의 버스 안이었고, 모르는 내가 봐도 열일곱 정거장째인 곳은 침사추이가 아니어서 무섭고 울고 싶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서 울 수만은 없었다. 여기는 길을 잃고 우는 나를 경찰서로 데려다 줄 친절한 내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큰 어른이 그 만한 일로 울기엔 그곳이 어디든 부끄러웠다. 눈물을 삼키며 두리번거리고 보니 나처럼 여행 온 여행객들이 버스안에 있었고, 그중 한 남자분이 한국분 같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해외여행 다니며 나름 터득한 건 "저기요"라고 물었을 때 고개 돌리며 "네?"라고 하면 나를 도와줄 반가운 한국사람을 마주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급할 땐 항상 용감하게 "저기요"를 외치고 다녔다. 그날도 버스 안에서 용감히 그분께 다가가서 "저기요"를 외쳤고, "네?"라고 반가운 한국말로 답을 하셨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을 나는 반쯤 울먹이며 사정 설명을 했다. 열일곱 정거장이 지났음에도 숙소가 있는 침사추이가 아니고, 난 지금 길을 잃었고, 당신이 꼭 도와줘야 된다는 간절한 마음까지 담아서.
그분이 유창한 영어로 기사님께 뭐라 뭐라 하시곤, 내릴 때 기사님께서 얘기해줄 거라 하셨다. 아마도 내 목적지를 얘기하시고 저기 보이는 저 불쌍한 한국 아가씨에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꼭 알려주라는 얘기였을 것이다.(참고로 홍콩 여행 이후로 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확실한 동기부여를 받았으니) 도움을 청했던 그분이 내게 괜찮을 거란 눈짓을 하고는 먼저 내리시고, 몇 정거장 더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내리라고 손짓하신 기사분의 몸짓이 딱 지금 내 처지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숙소에 찾아들어간 시간이 새벽 3시. 숙소는 인터넷으로 예매할 때 본 사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 속 이국적이고 깨끗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낡고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감성적이지도 않고 눈물도 없는 나는 그날 홍콩의 그 숙소에서 펑펑 울었다.
다음 날, 우선 숙소부터 바꾸자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열심히 찾아보고 전화도 해보고 하며 오전을 보냈다. 그리곤 숙소는 옮기는 대신 낡고 지저분한 숙소에 적응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시 옮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기엔 4박 5일 일정이 너무 짧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소 문제로 반나절을 보내고, 해변산책로에 '스타의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밤이면 유명한 '심포니 오브 라이트' 조명 쇼를 하는 곳인데 낮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경치를 감상하며 마음을 추스리기도 잠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어제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오전 한나절 숙소 때문에 심란했던 내 속도 모르고 비는 오고, 우산은 없고, 또다시 눈물이 났다. 타국에서 그렇게 비를 맞으며 눈물과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왔나''그래 혼자 해외여행은 무리야'
그러나 후회하면 뭐하나. 난 이미 혼자 홍콩인데.
우산을 사서 쓰고, 다시 맘을 다 잡았다.
'일은 이미 벌어졌어. 후회해도 집에 당장 갈 수도 없어. 이렇게 된 거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내자'
내겐 용감하게 즐기다 가는 선택지만 있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하버시티 앞에서 2층 버스를 타고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홍콩 도심을 구경하며 스탠리도 다녀오고, 침사추이와 센트럴의 거리를 거닐며 예쁜 상점도 구경하고 망고주스와 유명한 에그타르트를 사 먹기도 했다. 밤에는 빅토리아 피크도 올라가서 야경도 보았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보는 야경은 혼자 보기 아쉬워서 나도 다음엔 꼭 멋진 남자 친구를 만들어서 같이 와야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온통 커플들이었다. 나만 그 좋은 구경을 혼자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 타고 마카오도 다녀왔는데, 그때 잠시 동행했던 남자분에게 남은 여행은 자기와 함께 하자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낭만적인 고백을 듣기도 했다.
훗날 가끔 생각이 나서 웃음 짓게 하는 그 고백을 거절하고 남은 여행도 혼자 잘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 저녁, 숙소에서 조금 일찍 짐을 싸서 나와 첫날 갔던 스타의 거리로 다시 갔다. 집에 가기 전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밤 8시에 시작한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첫날 우울하게 봤던 그 쇼가 아니었다. 쇼가 끝이 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이번엔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났다. 천국과 지옥이 모두 내 맘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것을 봐도 내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랐다.
큰 깨달음을 얻으며 그렇게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최근에 그림을 배우는데,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자화상을 그릴 거니 자기 사진 한 장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홍콩에서 찍었던 셀카 사진이 생각났다. 선생님께서 제일 예쁜 사진 한 장 찾아보라고 하셨는데, 그 시절 그 순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그 때 그 시절 나는 참 예뻤다.
안 다녀왔음 어쩔 뻔했나 싶다. 지금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