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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Jun 04. 2021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다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의식들에 대해


일요일이었다. 평일 동안 누적되었던 수면부족을 한 번에 해결하기 좋은 오전 시간. 침대에 누워 수면과 가수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던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핸드폰 창 상단 가운데 선명한 친구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예감했다. 역시 부고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2년 반전에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고 계셨다. 가장 고통스러운 암이라는 폐암임에도 가끔씩 아버지의 상태를 물어보면 큰 고통 없이 잘 견디는 중이라고만 전해 들었었다. 그러다 지난주 고비가 왔다는 친구의 연락이 있었고 천천히 짐을 싸 문상을 갈 준비를 했다. 오랜 기간 투병하셨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인지 친구는 덤덤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다 어떻게 고비는 넘어가고 다시 일상의 생활을 하던 중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를 물어볼 때 주저 없이 원픽으로 꼽을 수 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상가에 최대한 오래 머물며 위로를 해줄 생각이었다. 춘천에서 성남에 위치한 장례식장까지 가는 길이 멀었다. 일요일, 나들이객의 귀경차량에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지하철과 택시로 한 번씩 갈아탄 다음에야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워낙 가까운 사이여서 알고 지냈던 친구의 어머님, 형님들, 친척에 조카들이 식장에 모여 조문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족들과 인사를 한 후,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다른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았다. 친구는 여전히 덤덤했다. 평소 우리끼리 여느 술집에서 만나 잡담하는 자리와 다름없이 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경황이 없는 친구를 대신하여 성남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렸다. 어느 선까지 소식을 전해 야할지를 나누는 것이 꽤나 까다로웠다. 한때 인연이 있었던들 수년간 교류가 없던 사람에게 대뜸 부고를 전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고심 끝에 연락을 한 친구들이 오후 늦게부터 하나둘씩 조문을 오기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은 월요일보다는 일요일이 더 편했을 것이다. 일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연락을 돌린 대부분의 친구들이 밤까지 찾아주어 첫날 빈소가 쓸쓸하지 않았 친구도 외롭지 않을  있었다.


사십이 넘었지만 상가에 조문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결혼식이야 이리저리 수십 번 이상을 다녀왔지만 아직 애매한 나이인지 문상은 낯설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하는지, 무슨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숙연한 분위기로 일관해야 하는지, 웃고 떠들어도 괜찮은지 명확한 기준을 모르겠다. 고작 상가에서는 건배를 하지 않는다는 정도 밖에는.


교인이었던 고인의 뜻에 따라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는데 헌화를 한 후 절 대신 묵념을 하라고 안내문에 쓰여있었지만 고인께 묵념 후 상주에게까지 목례로 끝내는 것은 너무 가벼운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친구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는데 한두 명은 절을 하려는 제스처에 상주도 맞절을 하다 멈칫하는 다소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춘천을 포함해 김포에서, 파주에서, 부산에서까지 온 친구들과 오랜만에 안부를 물으며 이런 일에만 얼굴을 본다는 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첫날 늦은 밤, 마지막까지 남아 친구 형님들과도 한잔씩 하고 나서야 근처의 처이모집으로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졌다.


둘째 날도 점심 즈음 도착하여 밥을 먹고 나자 곧 입관식이 치러졌다.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시신을 관에 옮기는, 그러니까 망자의 얼굴을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보는 시간이다. 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상주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친구의 큰 형은 입관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우셨다.


친구는 세 시간 정도 빈소를 비워야 했다. 친구 아이의 발달검사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쉽지 않은 예약을 잡아두었고 미룰 수가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명의 친구 조문객이 찾아왔고 다행히 아는 얼굴들은 친구를 대신해서 응대해줄 수 있었다. 결국 친구 얼굴을 못 보고 간 조문객도 있었지만 친구의 근황이나 기타 장례에 관련된 궁금증들을 다 설명해 주었다. 월요일에 조문 온 친구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였다. 저녁까지 적당한 간격으로 조문객들이 찾아왔고 피로가 쌓여갔다. 내일 아침 일찍 발인을 위해 장례식장 한쪽에서 쪽잠을 자겠다고 하니 친구가 여관을 잡아주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7시 30분의 발인에 맞춰 식장에 도착하니 휴가를 내고 온 다른 친구 두 명이 더 있었다. 운구할 사람이 적절치 않아 우리 친구 셋이서 관을 들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리무진에 싣고 화장터로 와서는 리무진에서 관을 꺼내 화장을 위해 들어가는 바퀴 달린 철제 테이블 같은 것에다가 관을 들어다 놓았다. 좀 기다렸다 관이 불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유족들은 마지막으로 오열했다. 화장에는 2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장지로 가기 전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25년 전, 아빠의 장례식. 열여섯 살의 나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고모들, 삼촌들, 집안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누가 오면 일어나서 기계적으로 절을 하고 측은해하는 사람들의 눈길에 한없이 주눅이 들 뿐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이 살던 집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검은 양복이 아닌 전통 상복을 입었다. 장의사는 굳어져 가는 아빠의 몸을 세게 두드리며 입관 준비를 했고 곁에 있던 누군가는 망자가 아프겠다고, 살살하라고 소리 지르며 오열했다.


아이고아이고. 집안 어른 누군가가 나에게 곡을 하라고  했는데 결국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놔두소. 애들이 곡을 아니껴?"라고 응수했다.

배가 고프고 잠이 왔다. 한여름 무더위에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다. 아빠가 관으로 들어가기 직전 엄마는 아빠의 손을 만져보며 "보시소, 아직 따뜻하니더."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오후 늦게 부고를 알렸음에도 장례기간 내내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쳤고 이후로도 내가 본 장례식 중 그때만큼 많은 조문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25년이 지난 지금이었다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았을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곡을 할 수도 있고 찾아오는 손님들께도 좀 더 예의를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냥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준 사람들과 간간이 웃어가며 잠깐의 대화를 나눌 여유도 있을지 모른다. 보내드리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도 마지막 인사는 훨씬 잘할 수 있었는데. 아빠는 이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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