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뱀을 싫어한다. 누구나 싫어하는 정도로 싫어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싫어한다.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드물게 다니는 이유도 혹시 뱀을 만날까 걱정되서이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나오는 뱀은 좋아한다. 실제 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서 보고 있으면 스릴이 느껴진다. 그래서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뱀이 등장하면 다른 동물로 넘어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본다. 요즘은 유튜브로 뱀과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우리 엄마도 나처럼 화면 속의 뱀만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전일 수도 있겠다.
춘천의 전원주택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전원주택의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여러 사람들이 단점으로 거론한 것은 대동소이했다. 난방비, 치안, 관리, 배달음식 등등.
그중에 가장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건 벌레, 뱀, 멧돼지 등 살아있는 생명체들이었다. 집 뒤편에 바로 산이 있어 여름이면 온갖 벌레들과 뱀이 걱정되었고 겨울이면 먹을 것을 찾아 민가로 출몰하는 멧돼지를 마주할까 무서웠다. 심각하게 주택에서의 삶을 다시 고민해보았고 나의 걱정거리에 힘을 실어줄 가족 구성원을 찾게 되었다.
여자들이 벌레를 더 무서워할 것이라는 편견으로 마당 있는 집으로의 이사에 들떠있던 딸아이에게 전원주택의 생활에 대해 다시 설명해주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든 벌레들이 집 안팤을 드나들 것이라며 겁을 주었다.
딸아이는 잠시 무언가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괜찮아, 벌레도 자연의 일부야.
Cool. 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나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자연과 함께 잘 살아보자.
2.
친구들이 집에 자주 놀러 온다. 보통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리 아이들이 내 친구들을 부르는 호칭은 이모, 삼촌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술 한잔 하면서 그간의 근황 토크도 하고 학창 시절 추억팔이도 하고 세상 욕도 좀 하면서 어른들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외부인이 집에 오면 약간 흥분된 상태로 변하는 딸아이가 아빠를 가만 놔둘 리 없다. 어른들끼리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끼어들어 나를 붙잡고 늘어진다. 주목받기 위해 피아노, 마술, 줄넘기 등 본인의 장기자랑을 뉴페이스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것이다. 처음에 한두 번 관심을 가져준 뒤에도 계속 우리의 대화를 방해할 때는 정색한 표정으로 딸아이의 말을 자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딸아이가 어른들과 헤어질 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몇 차례 주의를 주었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같은 행동이 반복되었다.
이모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하는 데도 시선을 회피한 채 다른 곳만 바라보는 아이 때문에 머쓱해진 아내가 하루는 감정이 폭발했다.
"너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
"엄마 내가 왜 혼나야 돼? 집에 가서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해줄게."
"먼저 엄마는 항상 한쪽 손으로 가방을 메고 한 손으로는 동생 손을 잡아. 나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동생은 아가니까 잡는 거고. 엄마가 널 왜 잃어버려?"
"나도 아직 아가고 전에 나 머리핀 샀던 날 엄마랑 아빠 나 잃어버렸었잖아. 그리고 엄마랑 아빠는 내 말을 안 들어 끝까지 듣지 않아. "
"그게 오늘 떼쓰고 인사 안 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그래서 나도 이제 엄마아빠 말 안 듣기로 했거든. 절대 안들을 거야."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아빠가 되고 싶었다. 아이의 친구들 이름을 다 외우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일 수도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에도 자연스레 들어와 자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을 텐데 번번이 차단당한다. 어른들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반감이 생겼을 것이고 그에 따라 엄마 아빠가 가장 흔하게 강조하는 인사예절에 대한 거부로서운한 마음을 표현했겠지.
해야 할 것은 고작 잘 들어주는 것뿐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참 쉽지가않다.
3.
춘천 이사 후 한 달 정도의 우울한 시기가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살림살이에 낯선 환경, 연고 없는 외로운 신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반면에 딸아이는 이사 오기 전보다 생기가 넘쳤다. 처음 해보는 학교 생활 하나하나가 너무 즐겁고 신기해서 온종일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이사 오기 전에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이사 안 가면 다녔던 유치원에서 3년 동안 사귄 친구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지만 이사하게 되면 아무도 모르는데 외롭지 않겠어?"
가서 새로 사귀면 되지!
호기롭게 선언한 것이 무색지 않게 딸아이는 하루에도 몇 명씩 새로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 댄다. 같은 반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마술수업에 누구, 클레이 수업에 누구, 플루트 교실에서 누구 등 춘천에서의 인맥이 수북이 쌓여간다. 주말에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이웃의 지나가는 꼬마 아이들과도 친구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나의 외로웠던 한 달간 아이는 그렇게 자기의 영역을 너무나도 빈틈없이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외로움에 지쳐갈 무렵 답답한 마음에 아이에게 농담 반 물어보았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친구를 쉽게 사귀어? 아빠는 아직 친구가 한 명도 안 생겼는데. 무슨 좋은 방법이 있어?"
"음.. 있지. 세 가지만 기억하면 돼."
"뭔데?"
남이 먼저 인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남이 먼저 손 내밀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다가간다.
그렇다. 친구 사귀기는 쉬운 것이었다. 딸아이의 가르침에 탄복하여 하루하루 실천에 옮기려 노력했고 지금은 다행히 몇 명의 친구라도 생겨 춘천살이가 조금은 풍요로워졌다.
얼마 전 스승의 날에 딸아이가 꽃그림을 그려주었다. 어버이날도 지났는데 무슨 카네이션 그림이냐고 물어보았다.
아빠가 나의 한국어 스승님이니까.
아이의 한글을 내가 떼어주긴 했다. 아이는 영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진 않지만 또래에 비해 언어 표현은 풍부한 편이다. 그래서 아이가 언어 사용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는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간다. 수사법 중 역설의 대표적인 예로 배운 것이 워즈워드의 시에 나오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표현인데 아빠가 되고 나서야 역설이 역설로 끝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