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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Aug 31. 2021

40대 공무원, 아직도 다른 직업을 꿈꾼다.

일로 해도 재밌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호텔 픽업 서비스로 지원하셨는데 혹시 프런트와 예약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남이섬 채용담당자에게전화였다.


얼마 전 지원했던 남이섬 안의 유일한 숙박시설 호텔 정관루에서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면접관들은 나를 보고 호텔 픽업 서비스보다는 일선에서 고객들을 상대하는 프런트와 예약이 더 어울린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대규모 공채에서 수많은 분야 중 픽업 서비스에 지원한 이유는 다른 분야에는 두드러진 경력이 없어 입사하기에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지방직 행정공무원들은 운전직을 부러워한다. 평생 악성민원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달고 일하느니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안전하게 운전만 하면 되는 운전직이 훨씬 정신건강에 좋겠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다시 시험을 쳐 운전직으로 일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격요건에 1종 대형면허는 필수적이며 1년 이상의 민간 운전경력을 요구하기도 하여 쉽지 않은 길이긴 하다. 


어쨌든 비교적 다양했던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서비스에 적합한 인상 때문인지 지원한 분야도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주신 분들 덕에 하루 종일 기분은 좋았다.




대학 졸업 직후 세 군데의 회사를 다녔고 세 번 사직서를 제출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합니다. 부디 선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어디선가 보았던 정형화된 사직서의 문장은 왠지 매력적이기도 했다. 많이 고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젊은 혈기에, 또 스스로 이 일은 나에게 맞지 않다고 합리화하며 대책 없이 회사에서 걸어 나왔다. 이직할 곳을 정해두고 나오거나 권고사직의 형태로 실업급여를 받는 영리한 대처를 할 상황도 능력도 못되었다.


서른셋의 나이에 다시 차가운 사회에 던져진 후 고심 끝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어렵지 않게 합격을 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평생 이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공직이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직장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 조직에서 어떤 큰 만족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윗사람들을 보고 있어도 기껏해야 미래에 저런 모습이 되는 정도라면 굳이 이상과 욕망을 꾹꾹 눌러가며 꾸역꾸역 다닐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일로 하면 재미가 없다.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처음 조건만 보고 입사했던 대기업에서 조직의 부품이 되어가며 지쳤던 마음이 항공, 방송, 영화, 광고와 관련된 일을 하는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을 때 서서히 회복되며 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회사에서도 본사에 발령받기 전 육개월 동안 OJT로 매장에서 고객들에게 판매를 하던 때는 만족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즉 돈벌이가 쉽지 않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나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재미를 느끼는 정도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서비스직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한다. 공무원도 서비스직이긴 하나 대부분 불만을 가진 사람들만을 상대하면서 하루하루를 마감하기는 싫다. 이십대에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고급 리조트에서 일하던 때나 전자제품 유통점에서 고객들에게 제품을 판매하던 그때처럼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좋은 서비스를 받은 고객들은 미소로 화답해 주는 그런 환경에서 일하면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다.


우리 사회가 직업을 대하는 모습은 아직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내가 하고 싶은 서비스직은 대체로 천한 직업에 가깝다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을 중의 을로 살아가는 것이 그러한 인식을 부추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에게 남이섬 면접 건을 얘기하니 펄쩍 뛰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나처럼 사회의 쓴맛을 알고 뒤늦게 들어간 사람에게는 최후의 수단, 마지노선  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더 물러서면 갈 곳이 없는 곳. 그래서 힘들어도 차마 그만두지는 못하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삶, 국가가 헌법으로 보장하는 신분, 급여가 적지만 매년 안정적으로 인상될 거라는 기대 등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달콤한 열매는 정말이지 너무나 달콤해서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다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그려 본다. 세상의 많은 다양한 직업군들을 보며 끊임없이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를 고민한다. 현실적으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졌고 앞으로도 그 폭은 점점 줄어들 일만 남았다. 공무원이라는 우리 사회의 무난한 일자리에 대한 포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감당하기는 버거운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남이섬의 호텔을 고민한다.




인사담당자는 면접관들이 내 인상을 좋게 봤다며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일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다. 그 말에 기분이 또 좋아져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당장 공무원을 그만두고 그곳에 입사하는 결정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아직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언젠가 보다 완벽하게 내 결정을 감당할 준비가 된다면 아직 내 인생에서 새로운 직업을 가질 기회는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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