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된다는 건 단순히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관계와 책임감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며칠 전,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카페 앞, 앉아있는 여럿 할머니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머님?" 시어머님이 복지관 수업을 마치시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날도 "딸이요?"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자연스레 "며느리예요"라고 확실한 선을 그었다. 우연히 만난 어머님과 잠깐 미주알고주알 나누니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한마디 하셨다.
"며느리라면서 참 싹싹하고 이쁘네."
며느리를 칭찬해 주는 말에 어머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전날 함께 저녁 식사 후 헤어졌는데, 몇 시간 지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니 나도 모르게 반가웠나 보다. 퇴사하고 나니 이렇게 우연한 만남도 생기는구나 싶었으나, 그날은 소소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진 날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처음으로 ‘K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K며느리. 한국 특유의 문화 속에서 며느리에게 요구되는 배려와 책임의 상징이다. 나도 그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 친정에서 ‘K장녀’로서 많은 일을 도맡아 하며 익힌 배려와 책임감은 자연스레 내 시댁에서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생각하는 관점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달랐기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처음엔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다르다는 느낌에 괜히 서러웠다. 누구 하나 구박하는 것도 아닌데도, 아낌없이 챙겨주고 사랑을 주셔도 순간순간 서러움이 크게 자리를 차지했다. ‘K며느리’는 처음이라 힘들었다.
신혼 초, 친정이 멀고 시댁이 가까운 것을 두고 안타깝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저 부모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를 키우는 데 큰 안식처가 되었다. 맞벌이 부부 시절, 나이도 많고 몸도 불편하신 시부모님께서 아이들을 전담으로 돌보아주실 순 없었다. 부득이 아이돌보미 선생님을 모셨지만, 그래도 긴급 상황에 연락드릴 수 있는 건 시부모님뿐이다. 직장이 멀어 연락받고 뛰어와도 두 시간은 걸리니, 급히 달려와 아이들을 챙겨줄 수 있는 분들이 가까이 있어 다행이었다. 가끔 아버님까지 달려와서 아이들을 맡아주실 때면, 급히 달려오는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누님들이 있지만, 며느리는 나 혼자다. 시부모님들께서 연세가 많아지니, 어쩔 수 없이 내 역할이 커질 것이다. 그동안은 두 분이 서로 잘 챙기고, 건강히 지내셨지만 80세를 넘기니 하루가 멀다 하고 점점 약해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나마 효자 아들이 적극적으로 챙기는 덕분에 지금껏 며느리의 역할을 크지 않지만,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배워온 모습인 것 같다. 친정에선 늘 외할머니와 엄마를 도와 많은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던 나였다. 여전히 모이길 좋아하는 친정 사람들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철철 제사를 지냈던 안동 권가에서 태어나보니, 제사상도 사실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K장손가며느리’로써 많은 제사를 챙기느라 힘겨웠던 기억 때문에, '내 며느리에게만은 그 짐을 지우기 싫다'며 결혼 전에 미리 제사를 정리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제사가 사라졌다. 명절에는 예배로 대체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면모로 변신한 채 결혼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주어진 ‘K며느리’의 짐은 한결 가벼울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 엄마는 막내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남보다 막내아들을 좋아하는 할머니 덕분에 모시고 살았다. 마지막엔 할머니의 병시중 하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대학생 땐, 내가 바쁜 엄마를 대체해 병간호와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렸었다. 그때 큰아들 두고 막내아들 집에 있는 할머니가 썩 반갑진 않았다. 제일 이상했던 건 모시기 힘들다면서 항상 할머니 용품이나 좋아하는 음식 구입 등 늘 먼저 할머니를 챙기던 엄마의 모습이 신기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가 뭐가 이쁘다고 챙기냐?" 볼멘소리를 했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할머니도 엄마였잖아." 하셨다. 그 한마디로 다 이해되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보니 정말 그 시간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시부모님도 내 남편의 부모님이다. 전쟁과 격동의 그 세월을 버티면서 지금 우리 시대보다 더 힘겨운 그 시절을 희생하며 사셨던 분들이라, 이제 내가 함께 보답해 드리는 것이 큰 어려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막상 끊임없는 병시중이 닥치면 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깐.
시간이 흘러보니, 적응하기 나름인 것 같았다. 다르게 살아온 삶이 적응하는 과정들이었음을 깨달았다. 상황을 받아들이니 서서히 이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엊그제 시아버님의 생신을 갑자기 우리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보통은 외식을 주로 하지만, 요즘 다들 건강에 이상들이 생겨 집에서 하기로 원하길래, "우리 집으로 오세요." 입이 먼저 나섰다. 어디 가서 입방정 떨지 않으려 늘 조심하는데, 이번엔 행동보다 입이 한 발 앞섰다. 사실 대가족 식사를 챙기는 게 쉽지 않다. 남녀노소 모두의 입맛을 챙기기엔 어려웠다. 그리고 시댁이 아닌가, 명절도 피하고 싶은 '시'자라는데 먼저 오시라고 했으니. 메뉴 구성부터 청소까지 스트레스가 쌓였다. 혼자 챙기기 힘들다고 형님들께서(고모들) 두 가지씩 음식을 챙겨 오셔서 걱정은 한결 덜었다. 큰 손님을 치르는 것이 약간의 스트레스가 생기지만, 히스테리는 남편에게 부릴 예정이라 알아서 잘 받아주라는 협박을 미리 좀 해두었다. 다행히 눈치껏 움직인 남편이라 큰 불화는 생기지 않았다.
내가 만들고 준비한 기본 반찬들
‘식구(食口)'는 함께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뜻한다. 예전보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 요즘, 쓸데없는 허례나 격식 대신 모두가 편안하게 그 시간을 즐기며 어우러질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기회가 있어야 사촌 누나, 형들을 만나서 놀기도 하면서 작은 인연들을 이어갈 수 있으니깐.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방식들이 고리타분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친정 문화 속에서 모두가 함께하는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살아왔고, 지금껏 그것들이 늘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에게도 그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 아니어도 가능하지만, 가능하면 가족부터 챙기는 게 좋다고 느껴진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란 상황이 아니라면 최대한 서로 배려하고 함께하는 것이 좋다.
결혼 후 11년, 낯설고 서먹했던 관계는 이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졌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간이 우리를 진정한 ‘식구’로 만들어 주었다. 모두 하나의 가족으로,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울타리이다. 아직 부족하고 어설픈 면이 있을지라도, 나와 시댁이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따뜻한 시간을 채워가며, 나는 오늘도 내일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