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발걸음은 방향을 향할 때 의미가 생긴다. 그리고 그 방향에 동행이 있다면 길은 더없이 풍요롭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사소한 소망이 내 삶의 방향을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 소망들은 작지만 특별했다. '버킷리스트'란 단어는 그렇게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막상 구체적인 평생소원을 적으려 하면, 현실적인 가능 여부를 먼저 고려하기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사소해서 쉽게 꺼내지 못한 채, 오히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소망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얼마 전 만 65세가 된 기념으로 친정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들이 서울나들이를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방에 계신 엄마의 친구들이 자주 서울에 오지만, 이번엔 특별한 나들이 계획이라며 연락이 왔다. 이번 여행 콘셉트는 친구들과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소망을 실행하기 위한 나들이라고 했다.
1. 친구들과 KTX 타고 당일치기 서울나들이
2. 남산케이블카 타고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사랑의 자물쇠 걸어보기
3. 남대문 시장에서 맛집 갈치조림을 먹고, 시장 투어. 등등
이토록 소소하고 귀여운 소망들이 어쩐지 소녀 감성을 닮았다 느꼈다. 어린 시절의 설렘을 떠올리는 일은 엄마들 마음속에 작은 낭만이었을 것이다. 평생 자식들을 먼저 챙기느라 본인의 꿈은 뒤로 미뤄둔 엄마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 더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딸과 데이트한 경험으로 서울 지리를 잘 아는 편인 엄마라, 본인이 스케줄을 짜고 있는데 어렵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와 친구분들의 여행을 위해 몇몇 추천 코스와 맛집, 이동 방법 등을 정리해 드렸다. 지도 앱 사용법과 택시 활용법도 덧붙여 안내하며 안전한 여행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일 때,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며 갑자기 날을 잡고 짧은 시간 준비를 했다. 온전히 본인들의 힘으로, 표를 예매하고 준비를 마쳤다. 서울 근교엔 첫눈이 폭설로 내려 교통이 마비된 다음 날이었다. 조심하라는 딸의 걱정을 뒤로한 채, 엄마와 친구들은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라 이 정도의 눈으로 발목 잡힐 분들이 아니었다.
아침 첫 차를 타는 시간에 연락했더니,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만 휴대폰 너머로 들렸다. 단짝 친구들끼리의 여행의 설렘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순간 나도 이리 친구들과 언제 여행을 떠났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아 너무 부러웠다.
서울에 도착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눈 내린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남대문 시장에서 갈치조림도 맛보았다고 한다. 요즘 유명하다는 명동 다이소까지 방문해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고르고,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장식 등 평소 자주 구경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고 한다. 틈틈이 연락이 오긴 했으나, 그저 잘 놀고 있다는 소식들에 안심이 되었다. 엄마가 보낸 사진 속에는 남산케이블카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친구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리는 아프지만 마음은 행복하다’는 엄마의 메시지가 따뜻하게 전해졌다. 맛집들 찾아다니고, 쇼핑도 하느라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신나게 웃고 즐겼을 모습이 상상되었다. 난생처음 서울 골목을 누비며 낯설고 두려운 마음들이 있었을 텐데, 친구와 함께라 그런지 그저 즐거운 추억들이 된 듯했다.
그렇게 짧은 투어를 마치고, 서울 사는 친구들을 만나 저녁 식사 후, 막차로 집으로 모두 귀가했다. 그리하여 만 65세의 서울 나들이가 짧지만, 작은 행복들을 담은 여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친구들이라 더욱 소녀 감성으로 다녔을 모습이 상상되어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한편으론 그런 열정으로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이 ‘나이는 들어도 마음만은 아직 젊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자녀들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소망들을 친구들과 함께 이루어가며 너무 행복한 시간들을 채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65세가 넘어도 소소한 소망 목록들을 잡고 움직였던 그 엄마들의 열정이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버킷리스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회사 다니면서 하지 못했던 일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여유를 느끼는 시간에도 주저하며 하고 싶다고만 맘속으로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봐야겠다.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만 소망 목록이 아니라, 너무 사소해서 그냥 지나치던 것들은 없었나 찾아보기로 했다.
'버킷리스트'란, 지금껏 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며 느끼는 설렘의 연속이 아닐까? 그 순간의 발걸음은 분명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었을 것이다.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을 친구와 함께하기에 서로 도와가면서 깔깔 웃으며 채웠을 그 시간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언젠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막상 시간이 나도 하루종일 책만 읽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간절히 원했던 소망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해야겠다고 미루어둔 것들이 없는지 나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아야겠다.
요즘 학부모 교육도 받고, 그림도 그리며 나름의 소망을 이루는 시간들을 보냈다. 바쁜 시간들 속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들이라 작은 행복 저금통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나의 소소한 소망목록들을 챙겨보면서, 오랜 시간 나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로 채워가려 한다.
매일의 글쓰기는 단순히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마음을 담아 특별하게 표현하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 또한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나만의 숨겨진 작은 버킷리스 트였을지 모른다. 조용한 이른 아침, 조용히 키보드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이 고요한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글을 쓰는 이 작은 기쁨이 참 행복하다.
소망 목록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특별함을 더해주는 따뜻한 불빛이다. 그 작은 불빛이 우리의 하루를, 나아가 삶을 더 환하게 비춘다. 거창한 소망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가 미루어둔 작고 소박한 소망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갈 때, 평범한 하루가 더없이 아름다운 나만의 특별한 페이지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가 이루는 작은 소망들이 결국 우리 삶을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