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남긴다는 것
직장생활에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맞이하니, 이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새로운 숙제가 시작되었다. 16년 동안 꿈꾸던 자유였지만, 막상 맞이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이 학교 알리미를 통해 학부모 교육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림에세이 수업>이라는 강의가 있어 글쓰기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강의는 그림과 글을 써서 책을 출간하는 과정이었다. 첫날부터 당황과 어색함 그 자체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미션이 주어졌다. 아이와 놀 때 색연필을 잡아본 것이 전부였는데, 작가소개에 들어갈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니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임시방편으로 셀카를 찍고, 자신만의 특징을 찾아가며 서툴게 그림을 그렸다. 얼마 후, 신청 동기를 한 명씩 나누고 각자 그린 그림들을 공개했다. 짧은 시간에 개성을 담아낸 그림들이 신기했다. 모두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라는 공통분모에 안심했지만, 남들의 미적 감각과 글쓰기 솜씨에 주눅이 들었다.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첫 수업을 마쳤다.
매주 주어지는 주제에 맞춰 그림을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글을 써야 했다. 연필과 지우개로 스케치하고 색연필로 채색하며, 그림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고민하며 나누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글은 숙제입니다. 그림에 어울릴 글을 써서 다음 시간에 나눌 거예요. 그림을 보충해 와도 좋습니다."
숙제라니! 그림만 그리면 될 줄 알았는데, 글까지 써야 한다는 부담이 밀려왔다. 한 주 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주제라도 각자의 글감과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남편과의 만남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오갔다.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울고 웃다 보니 부끄러움도 서서히 녹아내리고 각자의 글에 감탄하게 되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경험들을 덧붙이니 2시간의 교육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툴었던 그림 실력도 조금씩 완성도가 높아졌고, 마음속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림도 하나씩 완성하고 매주 글을 쓰다 보니 자아효능감이 채워졌다. 교육이 진행될수록 서로 더 반갑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5주 동안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고, 그렇게 모인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물론 교육 종료 후에도 한동안 여러 번의 퇴고 과정을 거쳤다. 처음 써본 글이라, 다섯 가지 이야기를 수정할수록 낯설게 느껴졌다. 퇴고를 해도 해도 만족스럽지 않아 점점 지쳐갔다. 그러면서 그동안 읽어온 책 한 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모든 작가들이 온전한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출간 기념회에서 받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면서도 벅찼다.
작가님, 책이 예쁘게 잘 나왔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글을 읽어보니 각자의 개성이 담긴 내용이 좋더라고요.
모두가 축하받는 자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책과 꽃다발을 받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한 책은 아니지만, 교육청에서 제작한 책이라 더욱 뜻깊었다. 그래도 내 이름이 인쇄된 책을 손에 쥐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살면서 내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퇴사 후, 우연한 기회로 내 이름이 담긴 책이 제작되는 행운을 누렸다. 책 위에 내 이름이 적혀있으니 더욱 신기했다.
내 이름이 남겨진 흔적이 있었던가?
대학시절 연구 발표로 학회지와 학회포스터에 실린 적은 있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졸업논문이 전부였다. 회사에서는 내 이름보다 회사명이 늘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이야기가 담긴 책에 내 이름이 남겨졌다. 순간 울컥했다. 결혼 후 ‘아내’라는 이름이, 아이가 낳고 ‘엄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퇴사 후에는 직장에서의 이름마저 사라졌다. 내 이름이 적힌 명함조차 더 이상 쓰일 곳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헛헛한 마음이 들기 전에, 내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남겼다.
‘공동저서’라는 작은 기회는 막막했던 내 삶에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책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수많은 책 속에 내 이름이 담긴 책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꿈에 한 걸음 다가갔다. 책을 손에 들었을 때,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꿈꾸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언젠가 내 이름이 박힌 책이 서점에 놓인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짧았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언젠가 내 이름을 단 단독저서를 남기겠다는 꿈이 더욱 선명해졌다.
세상에 몇 권밖에 없는 책을 바라보며, 내 이름을 세상에 남겨졌다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내 이야기를 담을 새로운 책을 꿈꾸며, 오늘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