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처음 만나는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법

by 지혜여니

안정된 삶이 최고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정년퇴직해 노후를 보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성실과 안정감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할 만큼 부지런히 채워가면 더욱 단단한 인생이 만들어지리라 여겼다. 삶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의 삶은 작은 균열조차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성처럼 보였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삶을 보면서 순간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퇴직 후 공허함을 토로하는 선배들을 보며 ‘이게 정말 최선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훨씬 나은 삶을 살 것이라 믿으면서도, 그냥 참고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우치기 시작했다.




5년 전 어머니께서 "정년퇴직하고 나면 삶이 무너질 것 같아 두렵고 걱정스러웠어.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기회가 되어 지금 한결 더 편안해진 것 같아. 해보지 않으면,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분명히 있더라."라고 하시며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서 변화를 이루셨다. 그것이 나에게 첫 번째 균열을 만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워킹맘 친구들 대부분이 회사를 떠나며, 나만 워킹맘으로 남았다. 아이 때문에 억지로가 아닌,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선택한 결정이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 친구의 영향이 두 번째 균열이었다.


그쯤, 나의 직위도 점점 올라가고 경력도 10년 차, 15년 차 채워지면서 은근하게 권태로운 생활들이 지속되었다. 현명하게 준비한 상사들은 서둘러 삶의 자리를 바꾸었고,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상사들만 점점 늘어나 후배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나이들은 많아지는데 뭔가 하기보다는 후배들에게만 늘 끈기가 없고 도전정신이 없다며 비난하는 모습들에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꼬장 부리는 선배들은 승승장구하고, 후배들은 버티지 못해 떠났다. 그러다 보니, 15년 차가 된 나도 여전히 막내였다. 이 기이한 현실이 세 번째 균열이었다.


가정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쳐지며 새로운 삶에 대한 자극이 필요하다 느끼면서 책도 읽고, 블로그 SNS세계도 알아가고 모닝챌린지도 도전했다. 새벽기상을 하면서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면서 '우물 안 개구리' 속에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 네 번째 균열이었다.



무엇보다 안정함을 추구했던 내가 16년 동안 회사와 집 밖에 몰랐으니, 나에 대한 기초 지식도 부족하고 40대에 새로운 삶을 꿈꾸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전전긍긍하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던 시간들이 다섯 번째 균열이었다.



긴 시간 동안 우유부단한 나와 싸우느라 지친 상태로 업무와 육아를 이끌다 보니 몸이 버티지 못하면서, 16년간의 직장생활은 허무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16년 치의 짐들을 정리하고 책상을 비우고 나오는 순간, 세상에 나의 소속이 없어진듯한 느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너질듯한 세상은 매일의 태양이 뜨듯,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다가왔다.



퇴사 전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떠나고 보니,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드디어 실감했고, 잠이 건강에 중요하듯 쉼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듯 한결 마음이 평안해졌다. 삶은 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아도 그 나름의 삶이 있다는 것도 깨우쳐주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핑계 대며 하지 못했던 일들을 찾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그림에세이 수업도 참여해 보고, 학부모강의도 듣고,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시간을 채워가는 재미도 느껴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동안 멀게만 느꼈던 것들을 배워가며 첫걸음마를 떼듯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책을 읽기만 하다가 어느새 글 쓰는 브런치작가도 되었다. 순간의 감정들을 담으며 공감을 이루어내고 싶은 마음들을 글로 하나씩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림에세이 수업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경험들을 담은 책을 공동집필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 과정을 통해 읽고, 쓰고, 그리는 걸 좋아했던 나를 새삼 발견했다. 매일 감사를 통해 내가 누리고 있던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쉼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가며 마음이 단단해지면서 자연스레 몸의 이상들도 줄어들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이 바뀐 요즘, 나의 행복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의 기준에선 40대의 퇴사가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나에게는 이 잠깐의 쉼이 큰 마중물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좀 더 나에게 집중하며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지금이 딱 적절하다 느꼈다. 현실적인 부분들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하나씩 준비하면 채워지리라 생각한다.


2025년 새해 소망은 "나를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한 해가 되기로 도전한다."이다.



힘찬 도약 전에 그동안 덮어두었던 나를 좀 더 생각해 주고 챙겨주는 시간으로 채우려 한다. 겨울이라 잠시 주춤했지만, 틈나는 대로 읽고, 쓰고, 걸으며 감사로 채우며 지금을 힘찬 도약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여긴다.



그동안 잘했고, 잘해왔고,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너를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