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이어준 엄마의 성장

책장을 채우며 삶을 채우다

by 지혜여니

어린 시절 우리 집 거실에는 비싼 전집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많은 책을 사들였을까? 자식에게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라고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걸까? 빼곡히 채워진 거실 책장을 보면, 그 속에 엄마의 기대와 자녀를 위한 정성 담긴 사랑이 묻어있는 듯했다. 세상은 오랜 시간 책 읽기를 필수적인 덕목으로 여겨왔다. 나 역시 책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남동생은 달랐다. 그는 늘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버려질 책들 속에서도 보물을 찾 듯 읽었고, 화장실을 갈 때도 한 권씩 들고 갔다. 내가 그림 대회에서 상을 받을 때, 그는 독후감 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였다. 그런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공부가 힘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때부터 뭔가를 끄적이고 가끔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책과 깊이 있는 대화의 시간은 갖지 못했다.




20대에는 삶이 힘겨울 때면 서점을 찾았다. 한두 권씩 사들고 왔지만, 책을 읽기보다는 채워지는 책장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책이 주는 위로를 어렴풋이 느꼈지만, 여전히 책 읽기가 습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자취하며 지내게 되면서 남동생과 자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TV보다 책을 좋아하는 남동생의 영향을 받아 장편소설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 등 같은 책을 읽으면서 서점 방문이 늘어났지만, 그저 심심해서 읽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책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엄마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이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소망들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무조건 아이들에게 책을 권했다. 책을 읽어주는 것이 마치 부모의 의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은 또 다른 노동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점점 책을 들고 오는 아이를 피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단순히 '우리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 단정 짓고 말았다.


여행 중 만난 책장


그러던 중, 코로나가 찾아왔다.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집에만 있어야 했다. 갇혀있는 듯한 답답함 속에서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었고,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몇 차례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격리되면서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심리적으로 급격히 지쳐갔다. 그때, 나는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아이들의 그림책을 무작정 꺼내 읽었다. 그냥 책을 펼쳐 들었을 뿐인데, 뜻밖에도 그림책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림책이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아이들보다 어른에게 더욱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림책을 읽으며 쌓이는 책의 높이만큼 마음의 치료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외출이 어려운 시기, 아이들과 할 수 있는 것은 책 읽기뿐이었다. 흥미를 잃은 아이들을 달래 가며 진심을 담아 읽어주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도 다시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초등 학부모가 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육아서와 교육서를 접하게 되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책은 필수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펼친 책들 속에서 나 역시 위로를 받고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육아서를 읽으며 현실과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도 한 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전정신이 싹트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읽었지만, 점차 나 자신을 위한 독서로 변해갔다. 책을 읽을수록 인생의 깊은 진리가 열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책에서 시작해 동화책, 청소년소설을 거쳐 점점 더 다양한 책을 접하게 되면서 내 독서력도 향상되었다.




서서히 책을 안 읽는 어른에서 책을 읽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이해도 빨라졌다. 책을 읽다 보니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블로그에 독서 후기를 남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은 필사하며 기록했다. 읽을수록 읽어야 할 책 목록들이 늘어나고, 서서히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차츰 엄마와 함께 책을 읽게 되었다. 이제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 '재미있는 책 읽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당한 책을 추천해 주고, 자주 서점에 가서 함께 고르는 시간을 가지면서 책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아이들 책장이 비워지는 만큼 내 책이 채워지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동안 다 읽은 책들을 정리하다 보니 책장에 공간이 생겼다. 이젠 그 자리를 내 책들로 채워가고 있다. 책은 읽을수록 지식이 쌓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기도 하다. 한 권을 읽고 나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게 하나씩 문을 열어가다 보니,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느끼며, 세상에 정말 많은 지식과 지혜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때로는 지쳐 책을 펼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읽어가는 것은 이제 책 읽기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책장에 쌓여간다. 언젠가 펼쳐볼 날을 기대하며 보관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시간이 지나 그때의 내 상황에 맞춰 펼쳤을 때, 때로는 새로운 의미를 선물해 주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로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이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깊이 있는 책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아 힘겹게 읽었지만, 모임 속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얻기도 했다. 다양한 영역들을 만나면서 사고가 넓어졌다. 혼자 읽었으면 절대 몰랐을 책들을 읽으며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내 시선도 점검해 본다.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 문장씩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행중에도 호텔에서 책을 꺼내 읽는 아이들



엄마 책장이 채워지는 만큼,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엄마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독서모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내가 쓴 글을 몰래 읽어보기도 했다. 책을 통한 성장이 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흔들리는 삶 속에도 오늘과 같은 미래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삶의 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부모님을 소개하는 글을 써왔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읽을 때면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듯한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젠 글도 쓰시는데, 얼마 전에는 공동책도 출간하셨습니다." 아이의 자랑에 괜히 얼굴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의 변화가 아이들에게도 자극이 된다는 사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펼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가족이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날을 기대한다.






책을 통해 나를 탐구하고,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조금씩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나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그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씩 내 인생책에 '오늘이라는 한 페이지'를 채워나간다. 그렇게 오늘도, 책과 함께 성장의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