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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Nov 10. 2023

막잔

백년해로를 해야 하는 이유

 초록색 융단이 깔린 넓은 거실 창가,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빛 커튼 뒤로 한 쌍의 연인이 뜨겁게 포옹을 하고 있다. 햇볕은 따사로우며 바람은 산들거리고, 흔들리는 커튼 뒤로 숨은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초록색 융단은 풀밭이고, 황금빛 커튼은 남자가 입고 있는 가운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림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다. 


 햇살 좋은 오월 어느 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야외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 직원들과 함께 갔다. 커피가 나왔다. 커피잔에 ‘클림트’의 작품 ‘키스’가 그려져 있었다. 책이나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에서는 보았지만 실생활에서는 처음이어서 반가웠다. 따사로운 봄 볕을 받으며, 클림트의 삶의 이야기와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키스 장면, 벨베데레 미술관이 궁전이라는 등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 작품을 차용한 커피 잔 하나로, 우리는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미적 감각과 감성을 키우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택배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그 카페에서 만났던 한 쌍의 ‘클림트의 키스’ 잔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감격했다. 우리 회사에서 청춘을 다 바쳤다는 하지혜 씨의 감각 있는 선물이었다. 여러 면에서 눈치 빠르게 일 처리도 잘하던 직원이었다. 그녀의 감성 있는 배려에 우리 부부는 함께 기뻐했다.

 

 그 후로 커피나 차를 마실 때는 꼭 이 클림트 잔에 따라 마시곤 했다. 특히 커피 전문점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다가 이 잔에 따라 마실 때는, 그림 속 연인처럼 키스의 뜨거움은 없어도 둘이 마시는 커피만은 뜨거웠다. 커피 맛을 음미하면서 두 연인의 정열도 함께 감상하는 행복한 커피타임을 보내 준 하지혜 씨에게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벌써 십여 년을 넘게 쓰고 있었다. 최근의 일이다. 삼사 개월 전일까? 커피잔 하나에 실금이 가 있었다. 그릇을 닦다가 그리 된 것일 거다. 너무도 속이 상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조심조심 닦아가며 사용했다. 세월이 가면서 커피잔의 상흔도 깊고 짙어져 갔으며, 슬픈 이별의 시간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눈 내리는 어느 날 아침, 그 실금은 별리의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홀로 남아있는 클림트 잔은 항상 외로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짝을 잃고 홀로 된 외 짝 잔의 모습이 안쓰럽다. 오늘 아침에는 그 잔에다가 물을 따라 약을 먹었다. 아내도 그 잔으로 물을 마신다.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한껏 높이고 맛있는 커피를 사다가 마셨던 그 잔이 물이나 따라 마시는 막잔으로 전락했다. 한 쌍이 짝을 잃어 외 짝이 되면 막잔이 되는구나! 결국에는 한쪽이 한쪽과 헤어져 짝을 잃는 것이 운명일진대 어찌 이리 쓸쓸할꼬. 그리움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쓸쓸함 일 것이다. 


 멀리 가버린 ‘클림트의 키스’ 잔이, 아직도 그립다. 혼자 남은 잔이 가여워, 가만히 내려 만져 보다 다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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