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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Nov 09. 2023

떡국

가난이라는 감옥

 20년간 감옥살이를 한 성공회대학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다. ‘담장 안에 갇혀 있긴 해도 사유의 나래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  감옥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이다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한다라고 썼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아침에 끓인 떡국을 어린 동생들과 먹고 있었다. “가난하니 국물이 진하다.”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동네 어귀 초가삼간에 살고 있었다. 마당에 놓아먹이던 닭을 잡아 떡국을 끓였으니, 국물이 진할 수밖에…. 세배객이 많은 집에서는 물을 넉넉히 잡아 국을 끓여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님들이 바로 돌아가는 섭섭함을 ‘국물이 진해 좋다’고 에둘러 말씀하셨을 것이다. 


 육십여 호의 집성촌에서 할아버지 연세가 가장 높았다. 낮에는 온 동네 젊은이와 어른들이 할아버지께 세배를 다녀갔다. 설날에는 세배꾼이 오면 간단하나마 다과를 내고 덕담도 나누는 것이 동네 풍속이다. 그러나 모두 절만 하고 달아나듯이 일어났다. 가난한 데다 안주인이 없는 집에서 무슨 대접을 바라겠는가. 


 세배꾼들이 쫓기듯이 일어나니 얼굴 안 서는 일이라 생각되어 매우 속상하셨으리라. 하루 종일 세배를 받으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어둡고 작은 방에서 어린 손자들을 앉혀 놓고 식사를 하시자니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로부터 육십 년 가까이 지났다. 설날을 하루 앞둔 그믐날 점심에 아내와 둘이 떡국을 먹었다. 내일이 설인데, 간단하게 먹자며 떡국을 끓였다. 아내가 “맛있지?”라고 물었다. 나는 ‘국물이 진하여 좋다’고 하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가 “왜 울어요?”라고, 물었다. “아니 그냥.”이라면서 아내의 눈을 피하며 뜨거운 떡사실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고 한다지만, 못내 부끄러웠다. 사립문까지 배웅하며 돌아가시는 분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께 세배하러 오시는 분들을 고마워해야 마땅하겠지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꽃향기 가득한 탱자나무 길을 걸어 다녔다. 어느 늦은 봄날, 울타리에 제법 큰 유혈목이(꽃뱀)가 탱자나무 가시에 세 군데나 찔려 죽어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가혹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무서움보다 안쓰러움이 앞섰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초록과 빨강이 아직 선명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참새가 많았다. 언제나 참새들이 수북이 모여 지저귀고 있었다. 사람 기척이 나면 후르르 저쪽으로 달아났다가 쪼르르 쪼르르 다시 몰려오곤 했었다. 아마도 허기진 뱀이 군침 도는 참새를 삼키려,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간 것이리라. 굶주림 끝에 탱자나무 위를 올랐다가 날카롭고 억센 가시에 몸통을 찔리고,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하다가 또 찔리어 숨을 거두었으리라. 소중한 목숨까지 잃었으니 무모함을 나무라야 할까 배고픔을 원망해야 할까. 


 쌀을 꾸러 윗마을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하늘을 우러르며 흘렸던 눈물은 왜 그리도 뜨거웠던지….. 그때의 가난은 가슴팍을 꿰어 꼼짝 못 하게 하는 탱자나무 가시요, 자력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유혈목이였다. 가난이라는 멍에는 절망이자 어둠이었다.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의지보다 훨씬 강하고 독했다.

하지만 캄캄했던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서 뒤돌아보니, 밖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가르침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어둠에 익숙해져 어둠이 보이는 법이다. 


 행상을 하면서 매일 몇십 리를 걸어야 했기에 체력은 단단해졌고, 고물 장수라 하여 함부로 내뱉는 모욕조차 웃어넘길 줄 아는 넉넉함도 배웠다. 노트 행상을 할 때 하루는 다방 아가씨의 “에이, 재수 없어!”라는 말을 듣고도 “지금 재수 있다고 했습니까?”라며 웃을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여행사의 일본 주재원 생활도 어렵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단돈 얼마라도 깡통에 넣어주는 측은지심이 이는 것도 가난의 가르침이리라. 소년 소녀 가장에게 첫해에 일만 원, 둘째 해에 이만 원, 이십 년 후까지 매월 끊이지 않고 후원할 수 있었던 것도 가난이 베풀어 준 은총이라 생각한다. 나이 들어 자그마한 여유에도 크게 행복할 수 있는 것 또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가난이라는 감옥살이도 겸허를 배운다면 그리 비싼 수업료는 아니다. 


☞  신영복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군사독재 시절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년 만에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성공회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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