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어둠으로부터
땅 속의 어둠을 견딘 씨앗만이 동네 어귀 느티나무가 될 수 있고, 초하루(朔)의 어둠을 이겨내야 온 동네를 비추는 만월(滿月)이 될 수 있다.
글을 쓰다가 침대에 누웠으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은 나를 자꾸만 멀리멀리 밀어냈다. 술을 한 잔 컵에 따라 책상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다시 폈다. 몇 번을 읽고 읽어도 항상 자유롭게 해 주며, 마음을 맑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글이다. 깊은 산 계곡물로 세수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무소유’를 술 마시고 벌게진 얼굴로 읽고 있으니, 스님께서 노하시지나 않을지 내심 두렵다.
취기가 올라오고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 누우려던 순간이었다. 불을 끄면 어둠의 진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 두 시쯤이었으니까. 방 안의 불을 껐다. 창밖에는 아파트와 도로의 먼 불빛이 숨을 쉬듯 깜박거렸다. 커튼을 쳐서 빛의 숨통을 막아 버렸다. 말 그대로 암흑이다. 5분쯤 지났을까. 커튼 틈으로 작은 빛이 여름새벽 여명처럼 기어들어 온다. 의자를 돌려 창문 반대쪽 출입구로 향하여 앉았다. 완전한 어둠이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참 좋다. 빛도 소리도 없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고 있다. 암흑과 적막의 한가운데에서 자유롭다. 빛의 시간보다 어둠의 시간이 더 자유롭다. 보이는 것은 어둠만이 눈에 가득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앞으로 병아리색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완전한 암흑도 없는 것일까.
나는 방안의 어둠과 자주 대면하곤 한다. 그러나 산속의 어둠을 보는 것이 더 좋다. 높지 않은 산이 따뜻하며 포근하게 어둠을 안고 누워있는 모습을 나는 사랑한다. 하늘과 산의 보랏빛 경계선이 초승달 눈썹처럼 선명하다. 그 위로 몇 개의 별이 반짝이면 최상의 실루엣이다. 여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나,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밤벌레 울음소리 들리면 더욱 좋다. 개구리나 맹꽁이 울음소리라도 상관없다.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그 정경이 감동적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 어둠이, 누워있는 소의 등을 닮아 좋다. 어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늘과 산이 빚어내는 경계선을 보고 있다. 어둠의 빛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산이 그러하듯이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도 어둠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정녕 좋아하고 찾는 것은 빛을 품고 있는 어둠이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빛을 찾고자 어둠 속을 헤맨다. 어머니 품에서 젖을 찾는 갓난아기처럼.
찾는 것이 빛이라면, 가만히 앉아 밝아지기 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기꺼이 깊은 어둠 속으로 나를 던져야 빛을 찾을 수가 있다. 행복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행복해지기로 마음을 먹어야 하듯이. 어둠의 심연으로 나를 던져야겠다. 혹독한 어둠 때문에 길을 잃더라도, 어둠 속의 빛을 찾겠다는 소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빛은 소망이다. 소망을 찾아 발버둥 치는 어둠의 시간을 어찌 덧없다 원망만 하랴.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자는 빛도 보지 못한다. 빛을 찾기 위하여 어둠을 견뎌야 한다.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빛이 보이고 고마운 법이다.
병아리색의 문이 보이더니 침대의 하얀 시트커버가 나타나고, 책장의 책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소망의 불씨가 횃불을 올리듯이, 작고 연약한 빛의 씨앗이라도 세상을 비추는 행복이 될 것을 믿으며, 나는 지금 어둠과 대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