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람 Nov 02. 2020

첫 술에 배부르고 싶다.

인생은 회로 먹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말이 소설이지 형식은


공주: 여봐라!
신하들: 예!!
공주: 당장 가서 내 칼을 가져오너라!


처럼 대사만 잔뜩 있는 글이었다. 자기 딴엔 재밌는 내용이라고 믿었는지 수십 번도 넘게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 게시한 후에도 들락날락하며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조회수는 조금씩 올라갔다. 댓글도 달렸다. 신기해서 한 편을 더 써 올렸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쪽지가 날아왔다.


소설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요ㅋㅋ 글 삭제하세요.


내용은 이게 다였다.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난 정말 재밌다고 생각해서 쓴 글인데 이게 소설이 아니라니! 충격을 받은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럼 소설은 어떻게 쓰는 거예요?


쪽지를 받은 사람은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보통 이렇게 악성 쪽지를 보내면 화를 내고 욕을 하는데 당신은 다르다는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몇 살이냐는 물음에 11살이라고 답하자 또 한 번 놀란다. 어른의 예상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이 새삼 짜릿했던 나는 더더욱 살갑게 굴었다.


저한테 소설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이어진 쪽지는 1:1 과외가 되었다.




그렇게 11살에 글을 쓰고 입시할 적과 대학 초반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글을 썼다. 경력을 굳이 추려내자면 10여 년 정도뿐이며 가장 근래인 3년 동안은 아주 바짝 썼다. 세상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구조여서 마냥 글에 파묻힐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나 동시에 좋은 핑계였다. 적힌 글은 폴더 한 곳에 조용히 쌓이거나 업로드해도 금방 삭제되었다. 그렇게 사이트에 게시된 글은 결국 0이었다.

당연히 인기는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무얼 잘 쓰는지, 어떤 재주와 연출력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사람들은 쌓인 글을 알아본다. 내가 쓴 글을 창피하다고 내려서는 안된다. 드러내 놓고 더 읽도록 내걸어야 한다. 부끄러운 글이라면 나중에 다시 쓰면 된다. 인간은 매일 100%의 실력을 낼 수 없으니 50%로 쓴 글도 공개하는 배짱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일종의 샘플이 되어 나를 설명할 적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러면 그 글들은 모두 그냥 쌓이느냐, 아니다. 세월이 걸린다. 축적된 시간을 활자로 치환해 꾸준히 쌓는 것. 대부분의 유명 작가들 모두 그런 과정을 겪은 후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간혹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작가, 라는 타이틀로 바로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운이 좋거나 재능이 남다른 사람일 뿐이다. 명성은 유지하는 일도 힘들다는 것을, 그 명성에 준하도록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Photo by Christin Hume on Unsplash


그러니 지금 당장 되지 않은 일에 안타까울 필요는 없다. 내게 주어질 명성을 유지할 능력이 없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자.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생활이 수련과 훈련으로 느껴져 다시금 무언갈 해내고자 하는 자신감으로 차오르게 될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르고 싶었다. 어쩌다 쓴 글이 빵 떠서 유명해지는 거나한 상상은 작가를 꿈꾸는 이라면 모두들 해봤을 것이다. 입꼬리가 쭉 늘어져 귀에 걸리다가도 로또 당첨만큼 터무니없는 생각인걸 알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치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는 기분에 껄끄럽다. 그렇다면 어쩌다 쓴 글이 아니라 열심히 쓴 글이라면? 아, 그렇다면 뜨지 않았단 사실에 더 슬퍼질 것이다.

밥 숟가락이 엄청나게 크면 배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랬다간 분명 체할 것이다. 우리는 한입 한입 느긋하게 씹어 삼키고 있다. 세월을, 인생을, 나의 삶을 공복에 천천히 누적시킨다.


만족스러운 포만감은 기필코 찾아올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