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공정함이란 단어가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또는 경험을 통해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돈과 권력 앞에 정의가 무너지는 무수한 상황을 목도하고 가끔 분노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며 방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공들인 노력과 수고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평가와 결과가 주어지길 기대하고 그렇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 크게 좌절한다. '공정한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우리가 여전히 공정을 실현하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는 이유를 책에서는 "누구도 공정 따위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는 역설적 가설을 내놓고 있다.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소위 말하는 개개인의 능력과 재능, 노력이라는 차이를 정당화하면서 열등한 누군가는 또다시 하위층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개개인의 좌절과 상실감이 쌓여 지금의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학생들의 잘못을 지적할 일이 있을 때 꼭 한 번은 듣게 되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이 학생들의 차별에 대한 본능적인 자기 방어라고 생각한다. 공평의 사전적 의미처럼 '치우침 없이 고르게' 모든 학생을 대하지 않는다면 왜 나만 미워하고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는 그들의 대응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동질성의 문화 안에서는 공정함의 잣대를 세우는 일이 더욱 어렵다. 대입제도는 어떠한가? 한쪽에서는 수능을 가장 공정한 평가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현재의 수시전형이 공정하다고 말한다. 객관적인 수치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수능 성적은 공정해 보일 수 있지만, 수능도 결국엔 누가 제한된 시간에 얼마나 많은 정답을 도출하느냐의 싸움이다.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수능이라는 시험 제도가 버거운 학생들이 너무 많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등급이 나오지 않는 그들에게 '공부 못하는 건 니 책임이지'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고입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비평준화 지역인데, 평준화라는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중3 학생들이 희망교, 또는 근거리를 기준으로 성적과는 상관없이 무작위 배정되는 것을 말한다. 비평준화 지역의 학생들은 자신의 중학교 내신 성적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달라진다. 지원자들의 내신성적 커트라인에 의해 고등학교에도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의 대입제도와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읍, 면 단위로 확대되는 지역의 특성상, 소위 말하는 뺑뺑이로 무작위 배정을 할 경우 불가피하게 발생할 원거리 통학생들에겐 평준화 제도가 불공평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학교 내신 성적순으로 희망교를 배정하는 지금의 제도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결국 공부라는 재능과 개인의 노력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원거리에 있는 원치 않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내 비선호 학교인 본교 입학생들 중에는 실패에 대한 상처와 함께 자존감이 낮은 학생들이 꽤 있다.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은 호봉제 월급을 받는다. 연차와 경력에 따라 정해지는 호봉제 하에서는 업무의 양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보람과 책무성만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연봉제처럼 조직의 혁신과 성과를 위한 당근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런 조직에서는 대부분 일을 더 많이 가져가는 쪽에서 불공평을 호소한다. 과거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시장주의와 경쟁 원리를 이용하여 이런 부분을 해소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때 도입한 성과급 제도가 그중 하나이다.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여 경쟁을 통한 성장을 꾀하고자 했으나 출발부터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현재도 학교마다 해마다 골치 아픈 논쟁거리 중 하나로 전락해 있다. 이윤이나 실적이 아닌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어 성과급을 차등 지급해야 모두가 만족하는 공평한 결과가 될 수 있을까? 결국 시간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영역을 소수점까지 환산하고 급간을 최대한 촘촘하게 하여 최대한 누구도 불리하지 않게 하는 정밀한 수작업의 결과만 남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돌아온 탕아,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루가 복음서 예수님의 비유)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집 나간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기뻐하며 큰 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나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고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큰 아들과 남겨진 양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목자의 선택은 세상 불공정해 보인다. 동생이 바깥세상을 즐기는 사이에 아버지 밑에서 묵묵히 일만 하던 큰 아들은 고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가 성대하게 열리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다. 만약 99마리의 양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들 역시 자신들을 버리고 간 목자에게 분명 서운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자신의 품에서 안전하게 지낸 첫째 아들의 평온한 삶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송아지 한 마리 잡아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목자 역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다수의 양보다는 길 잃은 한 마리의 나약함이 더 신경 쓰였을 수 있다. 이처럼 저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공정함의 기준은 다르기에 어쩌면 공정함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 공정할 수 없다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철저히 나를 배제하고 완벽하게 대의를 위해서 공정함을 논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미래의 교육을 말할 때 위의 그림이 많이 거론된다. 사실 equality, equity, justice는 각각 평등, 공평, 공정으로 의미는 다 비슷한 것 같아도 그림을 보면 확실한 차이가 느껴진다. 우리가 그동안 강조했던 공정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면 공정한 결과가 나올 것이란 기대와 확신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해왔던 게 아닐까? 공정을 위한, 공정을 향한 고민과 투쟁은 계속되겠지만 공정으로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은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세 번째 그림을 보며 생각한다. 연대하고 배려하는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