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폰이 생기기 전의 딸과는 둘이서 책을 읽고 필사 노트를 바꿔 읽었다. 내 필사노트를 딸이 다 읽지는 못 하지만 제목 보면서 재미있겠다, 없겠다 평을 내리면서 나름 둘이서 독서모임 하고 있었다. 필사를 하고 느낀 점을 써서 가져오면 나도 한 줄씩 덧 붙여주는 별 것도 없는 이 방식도 좋아하던 딸이었다. 그놈의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에는 도서관, 서점 가길 제일 좋아하던 딸이 몇 달 만에 변했다.
"진아는 책 많이 읽죠?"
"진아 엄마는 작가니까 책 읽기는 문제없겠네요."
"우리 애도 진아처럼 책 읽으면 좋겠네요."
주변 엄마들이 그런 말을 할 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진심은 '암요, 그렇고 말고요. 많이 읽죠. 제가 작가인데요 그럼. 진아로 다시 태어나라고 하세요.' 이랬다. 그런 나의 오만함과 방자함은 스마트폰이라는 신이 딸에게 나타나자마자 산산이 깨부수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집 상황은 어떤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 딸만 이런 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집 아이는 책을 잘 읽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다들 한숨이었다. 스마트폰이 있는 여자친구들은 우리 딸과 같은 증상에 시달린다고 했다. 손에서 안 놓고 늘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상사병 수준이라며 책을 놓은 지 한참 되었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없는 아들은 좀 ㄷ다르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르지 않았다. 축구를 하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풋볼을 하느라 책은 안중에도 없다고 했다. 발로 차도 구르지도 못하는 책을 왜 보냐며 못 본 척한다고 했다.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건 다행스럽기도, 걱정스럽기도 했다. 우리 딸만 겪는 일은 아니니 대중에 묻혀 가면 그만이었다. 모두가 겪는 일이라니 나 하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엄마는 뭐라도 해야 했다. 열이 나면 밤새 못 자는 아기를 업고 안고 간호하듯이, 이름난 유치원 입학을 위해 대학 입시보다 어렵게 새벽부터 줄 서기를 하듯이, 꼭 가지고 싶다는 스티커를 위해 새벽부터 마트 앞에 줄을 서서 빵을 사듯이 엄마라면 해야 했다.
엄마라면 책 읽게 해야 했다.
책 안 읽는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를 간호하듯, 유치원 대기 줄을 서듯, 빵을 판매하는 마트를 찾아 헤매듯 찾아 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