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중독이 되어버린 이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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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느낀 허기의 일기
2020년 여름, 가고 싶었던 컨설팅 회사 취직에 실패한 후 Plan B 였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마지막 회사의 탈락 발표일은 8월 28일, 대학원 개강일은 9월 1일. 휴학 없이 정규학기 11학기와 계절학기 6학기로 채운 학부생활을 끝마친 뒤, 석사 생활의 시작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일뿐이었다.
회사 탈락에 대한 아쉬움은, 학부생 때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석사 때 마음껏 도전해 봐야겠다는 기대감으로 위로했다. 나는 파티플래닝, 이모티콘 제작, 창업 공모전 지원, 대학원생 유튜브, 아크로바틱, 바디프로필 등등의 버킷리스트를 마음껏 펼쳐놓았고, '아직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아!'라고 되뇌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맞이했다.
하지만 대학원 생활은 자유롭게 취미생활을 즐길 만큼의 여유가 녹록지 않았다. 겁 없이 12학점을 수강신청한 나는 강의와 과제에, 맡겨진 연구실 일들과 임무에 쫓겨 '진짜' 비전은 계속 뒷전으로 밀리고 쌓이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 내가 세운 목표들을 지키지 못해 조바심은 늘어만 갔고, 대학 입학 후 쉴 틈 없이 6년간 내달려진 기분에 점점 지치고 힘들어져 갔다.
더군다나 연구에 대한 의구심은 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외로움을 증폭시켰다. 산업공학 연구가 세상에 도움이 되기나 할까,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그 끝에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 혼자 머리를 싸매며 연구하는 일은 답답하고 불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수학을 잘하지 못했던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고, 결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항상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연구실에서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것만 같아 자기효능감은 계속 떨어졌고, 나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고 싶은 욕심과, 그럴 시간과 여력이 부족하다는 한계 사이에서 불안감이 커져갔다.
2020.10.18 일기
내가 대학원을 왜 힘들어하는가 생각해봤다.
남들은 '할 만하지 않아?', '회사생활보다 낫잖아' 하는 것들을 왜 유독 나만 적응하지 못하는 걸까.
1. 컨설팅 탈락의 대가로 온 대학원에 대한 기대는 '조금이나마 나은 워라밸', '학생 생활을 더 즐김'이었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만족되지 못한 채 박봉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실망감 때문
2. 다른 공대 대학원생들처럼 시니컬한 스탠스로 기계처럼 공부하며,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안주하고 싶지 않은 저항감 때문
그나마 외부 프로젝트는 재미있다. 할 일이 많았고 오래 걸렸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돕고 영향력을 끼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 위에 과제와 공부 로드가 쌓이며 course work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공부의 목표지점에는 내가 원하는 것들이 없어서 현타가 왔다.
그렇게 나는 다이어트를 (또) 하기로 결심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습관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나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고 불안하니, 살을 빼고 예뻐져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지.'
불안이라는 감정이 강한 저는,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꼭 통제할 무언가를 찾곤 합니다. 청소나 정리정돈을 할 때도 있고 할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면 불현듯 영어 공부를 더 하기도 하고, 모은 돈이 얼마인지 계속 확인하기도 합니다.
한 때는 식단을 조절하고 체중을 관리하며 통제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저는 불안해지면 뜬금없이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애인이 떠날까 봐 불안한 저, 일을 잘 해내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해연 씨, ... - 「또, 먹어버렸습니다」, 198pg
이런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설명한 책이 하나 있다.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는 많은 여성들 내면에 깊이 뿌리 박힌 마른 몸과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을 페미니즘적인 접근으로 분석한 에세이다. 단순히 1950년 이전 미국의 남성주의적인 시대 흐름 내에서 발생했던 문제들 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이 어떻게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계승되었으며,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난 후 소비주의 시대상에 맞물려 현대까지 남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욕구와 관련된 모든 장애가 그러하듯이 '굶는 행위'는 너무도 다양한 갈등과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적어도 처음에는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시작된다. 굶기에는 정도에 어긋날 만큼 좋은 느낌, 옳은 느낌, 혹은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열쇠가 제자리에 딱 맞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고, 어떤 괴로움을 가라앉혀주는 면이 있다.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24pg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512463
바디프로필로 발현된 정서적 공허함
이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굶고 있을 때, 폭식과 구토의 악순환에 빠져 있을 때, 또는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집착하고 있을 때는 그 외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더 폭넓은 기회가 있는 자기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보는 것도 어렵고, 으스러뜨릴 듯 강렬한 그 단 하나의 열정에 그토록 집중하는 것 말고 자기가 그 외에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거나 두려워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지극히 어렵다. ... 그 시절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내가 얼마나 망연자실한지, 얼마나 형체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는지, 혹은 필요의 문을 완전히 꽝 닫아버리지 않았다면 내가 얼마나 많은 필요를 느꼈을지에 관해.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101pg
나는 무언가에 크게 허기져 있었고, 그 허기를 만들어낸 '욕구의 정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결여를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우려고 했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일련의 과정은 전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며, 나 포함 많은 젊은 여성들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책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에서는 두 가지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런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는 여성들이 어렸을 때부터 '허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사회가 여성들의 욕구를 수많은 남성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문제에 결부시켜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면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만큼이고, 무엇인가? 진정한 열정은, 아름다움 혹은 날씬함이라는 외적 목표 뒤에 감춰진 진짜 허기는 '무엇'인가?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76pg
... 일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자 청소년들을 두고 그들 자신의 "욕망에 관한 담론이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교과서적 사례다. 우리 세대 여자아이들은 (지금도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그렇지만) 몸에 관한 솔직한 정보를 그리 많이 얻지 못했고, 여성의 성적 육체와 육체의 흥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랬다.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247pg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그때 우리가 배운 교훈들은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이미지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생명을 이어갔다. 우리는 몸을 느끼거나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자신의 강점들을 알아보고 인식하는 방법을,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담고 있던 포장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존중하거나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신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웠고, 섹슈얼리티를 욕망의 대상이 될 능력과 결부시키도록, 우리 몸의 가치를 타인들에게서 찬탄을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측정하도록 배웠다.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250pg
현대 소비문화에서 여성은 욕망의 주체 - 스스로 대상을 욕망하도록 부추김 당하는 사람 - 인 동시에 욕망의 주요 대상이며, 관능적이고 날씬하고 육체적으로 완벽한, 대대적으로 유포되는 이미지의 핵심 판매 도구라는 기묘한 입장에 처한다. ... 그런데 이 무언의 - 제대로 된 욕망을 가지면 당신도 욕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 약속은 심각한 부조화의 느낌을 자아낼 수 있다. ... 신시내티 의학대학에서 실시한 대규모 조사에서, 3만 명의 여성이 체중을 줄이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이루고 싶은 목표라고 작성했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여성에게 식욕 문제가 얼마나 복잡다단한 문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게 여자들의 가장 주된 목표일까? 욕구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가? -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40pg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다이어트를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미묘하게 다양한 문제들로 얽혀있는지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동안 외쳤던 '나는 자기만족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거야'라는 말의 순도는 몇 %라고 할 수 있을까. 작년 10월의 나는 이 가능성 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완벽하지 못한 외모'가 내 본질적인 허기라고 생각했으며, 살을 빼면 자존감이 다시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침 주변에는 다이어트를 도와줄 친구들과 자원들이 있었고, 그들의 응원과 자극을 받아 아예 바디프로필을 찍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10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76일간의 바디프로필 준비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완벽주의적 통제의 달콤함
다이어트를 시작한 후의 삶은 매우 건조하게 돌아갔다. 2020년 11월과 12월,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들을 최대한 멀리한 채 (혹은 친구들에게 '샐러드 약속'을 강요한 채) 집 - 헬스장 - 연구실의 루틴을 반복했다. 남자친구도 없고, 간혹 하던 소개팅도 중단하고, 지인들도 만나지 않았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 혼자였다. 매일 머릿속에 들어있던 생각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몇 시에 운동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더 살이 빠졌는가'였다. 건조한 대학원 생활에 더해진 다이어트는 내 삶을 더욱 파삭하게 만들었으며, 빡빡한 본업을 소화하는 와중에 끼워 넣은 새로운 목표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야기했다.
당시의 내 생각 회로는 공격적인 기어처럼 돌아갔다. '이거 다음에 이거 다음에 이걸 해야 하고, 오늘 안에 이걸 주문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거, 다음 주에 잊지 말아야 할 어떤 것과 시간이 나면 해야 할 무엇이 있다'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분 매초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지고 있지 않을 때 불안했지만, 붙잡는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야를 좁혀 내 삶의 목표를 '바디프로필'에 집중하는 것이 맘 편했고, 이 다이어트가 끝나면 불안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외면했던 것은 나에 관한 진실된 담론이었고, 대학원에서 나는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준비기간 76일, 감량한 체지방은 7kg, 늘어난 근육량은 1kg, 최종 체지방률은 17.3%.
생리는 멈췄고 더 이상 아랫배에 잡히는 살은 없었으며,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딱딱한 뼈 때문에 엉덩이가 아파왔다. 마지막 한 주 나는 매일 800kcal를 먹으며 악바리로 버텼고, 하루를 0.5배속으로 힘겹게 영위하는 듯한 나날을 이어갔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바디프로필과 바디프로필이 끝나고 먹을 음식 리스트뿐이었고, 다이어트 이외의 일들을 생각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렇게 12월 31일 나의 바디프로필은 '아름답고 성공적으로' 끝났고, 인스타그램에 올리 사진 덕분에 생전 받아보지 못한 감탄과 찬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억누르던 불안과 통제는 시한폭탄처럼 터져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