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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taetae Oct 05. 2022

원래 그랬던 걸까, 내가 지금 안 것인가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자이언트북스.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원래 그랬던 걸까, 내가 지금 안 것인가. 한창 책을 읽어나갈 무렵, 미국에 역대 5번째로 강한 태풍이 왔단다. 뉴스 속 기자는 허리케인으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8월에는 서울에 정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서울 남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는데, 영광스럽게도(?) 나는 그 역대급 물난리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한편으론 당사자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장마철답게 비가 또 내리나 했다. 물론 좀 많이. 예보의 예상은 계속 빗나갔다. 아침부터 온 비는 오후에 그치지 않았고, 저녁에도 그치지 않았으며, 새벽 늦게나 돼서야 그쳤다. 그 비는 내가 알고 있던 비와 달랐다. 차량 앞유리에 달린 와이퍼는 쓸모가 없었다. 최고의 속도로 와이퍼는 움직였으나 그보단 비가 내리는 속도가 압도적이었다. 나는 내 위치라도 가늠하고자 상향등을 켰다. 도로에서 처음 켜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압 세차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내리는 비에 대해, 물은 빛을 가로막았다. 길거리의 쓰레기들과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은 배수로를 막히게 했고 그 위로 물은 차올랐다.   

  지극히도 평화롭고 익숙한 공간에 내리는 낯선 비는 나로 하여금 '기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바야흐로 '역대급'의 시대이다. 뉴스에 보도되는 이상기후들은 하나같이 역대급이다. 혹은, 이견의 여지없이 1등이다. 가령 예전에는 이와 비슷한 소식을 접했을 때 반응이 '헐 어떡해'였다면 이제는 '저게 말이 되나?'인 경우가 많다.  기술과학의 발전으로 찬란한 문명을 누리고 있다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기후는 아직 멀었다면서 위력을 과시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기후가 아닌 자연의 범위에서도 해당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년의 시간이 마비되었다. 


  SF소설 신드롬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김초엽 작가의 글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드디어 읽게 되었다. 궁금했다. 그녀가 글을 어떻게 쓰는지. 하지만 희한하게도 SF장르의 소설은 막상 읽으면 재밌게 읽음에도 그것을 시작할 때쯤이면 왠지 새로운 공부를 하는 것만 같아 내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그런 특징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을 꾹 누르고 책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김초엽 작가가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작가는 미래 지구에 대해 다룬다. 미래 지구는 '더스트'라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 더스트는 내성종이 아닌 이들에게 급성 중독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측 가능한 대로 인간은 그 전에도, 그 와중에도, 그 후에도 계속 서로 싸울 뿐이다. 이때, 특이한 어느 식물 '모스바나'가 매개가 되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더스트(dust)는 '먼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먼지를 떠올려보자. 회색빛을 띠고 있는 푹신한 뭉텅이가 생각난다. 이런 먼지는 주로 실내에서 발견된다. 누군가 버린 것이 아니라면 야외에선 찾기 힘들다. 더러운 먼지. 잘 청소하지 않는 침대 밑을 어쩌다 한 번 청소하노라면 어김없이 등장하여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그 먼지. 하지만 정확하게 따져본다면 그것은 야외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먼지가 인간의 신발이나 몸에 달라붙은 것으로부터, 혹은 바람이 싣고 온 먼지가 쌓이고 쌓여 우리가 아는 그 먼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요즘 들어 새롭게 등장한 초미세먼지나 미세먼지 등은 우리의 기관지를 시큼하게 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먼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실내나 실외 둘 다 먼지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간에 우리는 먼지와 함께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먼지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지를 왜 혐오하는가? 같이 이 험난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에도 말이다. '몸에 좋지 않으니깐'이라는 반론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기 때문이다. '더러우니깐'이라는 반론도 비슷하다. 더럽고 깨끗하고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히려 먼지 입장에서 우리는 더러운 존재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비율의 먼지는 인간을 통해 만들어진다. 신발을 잘 털지 않고 실내로 들어오고, 짧은 거리를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매연을 뿜어낸다. 한 종류의 흙을 인위적으로 모아논 운동장이라는 곳에서 흙먼지를 일으킨다. 밥을 먹기 위해서, 옷을 입기 위해서 공장의 가동은 필수적이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컴퓨터, 정수기 그리고 내 호흡으로부터 먼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것이 설령 비윤리적이거나 윤리적이라고 여겨짐과 상관없이 어쨌든 우리 인간은 먼지를 발생시키며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곧 '먼지 발생기'인 것이다. 


“우리는 순진무구함(비폭력)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출처] https://blog.naver.com/sting762/220478310021 

    

  메를로 퐁티의 말이다. 대학 시절, 우연히도 내 역량보다 과분했던 일을 맡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하루하루가 피곤했다.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나를 필요 이상으로 보챘다. 그러나 그 보챔은 예민함으로 이어져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진 나는 정말 잘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팀이 성공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철학과 관련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이건 노는 일이 아니다, 나는 공부하고 있는 거다,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유튜브에 있는 철학 강의를 틀었다. 그때 메를로 퐁티의 '인간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으나 다른 피해를 주는.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꼭 이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무심코 했던 말이, 무심코 행동했던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 있다. 한 번 상처가 났다고 했을 때, 상처가 나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조금 더 확장시켜보자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폭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차피 폭력을 저지를 운명을 타고났는데 말이다. 사실상 숨 쉬는 것도 폭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 숨을 쉬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메를로 퐁티의 저 말에서 '폭력의 종류'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법에는 경중이 있듯, 폭력에도 종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만약 A와 B라는 행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퐁티에 말에 따라, 어쨌든 두 행위 모두 폭력의 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A보다 B라는 행위에서 타인이 받을 피해가 적을 가능성이 크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A 말고 B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A보다 B에선 상당한 수고로움이 뒤따름과 동시에 A의 행위를 통해 얻는 물리적, 정신적 보상이 더 큰 경우가 많다. 당신은 어떤 행위를 선택하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떤 행위를 선택할 것인가?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통을 씻어서 버리자는 말에, 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런다고 해서 재활용될 확률도 낮고, 재활용된다고 해도 그 효과는 솔직히 모르겠어. 저번에 중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나는 거기서 쓰레기 버리는 거나 공장 가동하는 거 보고 이제 그냥 포기한 상태야." 아마도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조그마한 양념 플라스틱 통 하나 재활용하는 것은, 만약 그게 성공적이라 하여도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수에서 비롯된 무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대학 3학년 때 들었던 어느 전공수업이 떠오른다. 교수님께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해 장광 연설을 늘어놓으셨다. 특히 교육적 측면에선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이에 매료되었다. 그렇게만 되면 정말 완벽한 학교가, 사회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질문했다. "교수님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에 "나도 모른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들떠 있던 것도 잠시, 멋진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나는 시무룩해졌다. 이 모습을 본 교수님은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때까지 나는 열심히 논문 쓰고, 가르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시간과 함께하는 것들은 비가역적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고 기후 변화가 그렇다. 숨 쉬고 있는 지금이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말이 있듯, 지금의 지구가 가장 아름다운 지구임은 분명하다. 미세먼지, 홍수 또는 폭설 등의 이상기후가 일어난 이전의 세상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가령 그때 홍수가 할퀴고 간 지역 사람들은 평생 모종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남겨진 것은 이후의 지금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모스바나'라는 식물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가 이어진다. 즉, 식물이 주된 주제이다. 그런데 왜 식물일까? 김초엽 작가는 작가의 말 부분에 이에 대해, '식물은 뭐든 될 것 같아서'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식물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허나 분명 식물 하나는 약하다. 특히 나무가 아닌 풀은 더 그렇다. 대부분의 풀 한 포기는 힘만 주면 쉽게 뽑힌다. 그러나 여러 포기는 어떠한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힘없이 뽑힐 것 같은 잔디를 힘줘서 뽑아본 기억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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