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경수술은 고대에서 시작되다.
대부분 남학생은 6학년 겨울방학과 졸업을 하고 나면 하고자 하는 수술이 있다. 바로 포경수술이다. 이유는 포경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식기가 불결해지고 염증에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포경수술을 청결의 의미로 학생들 수업에 임했다. 하지만 현재 포경수술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본래 귀두는 포피라는 조직에 덮여있다. 이 상태를 포경이라고 한다. 이때 발기를 하면 포피가 뒤로 젖혀져 귀두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포경수술은 바로 이 상태를 유지해 포피를 뒤집는 성형술이라고 할 수 있다.
포경수술이 성행했던 초기에는 찬성론이 우세했다. 보통 포경수술을 하면 여자에게 좋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귀두 노출로 자극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성기능을 향상하고 음경암, 여성의 자궁경부암 등의 질병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론에 의하면 위의 질병은 포피가 깨끗이 유지되고 발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포경수술은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람은 꼭 포경수술이 필요하다.
먼저 어린이 중 하부요로감염의 재발로 자주 병원 신세를 진다면 수술이 필요하다. 특히 청소년기에 들어서 남성 호르몬의 역할이 활발해지면 분비물의 생성도 왕성해진다. 만약 운동이나 자위행위를 자주 하고 목욕을 게을리하는 청소년이라면 수술이 필요하다. 성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질환적인 면과 개개인의 생활 습관, 경제력, 성생활의 패턴, 위험 노출 등이 수술의 필요성을 결정한다. 이는 비뇨기과 전문의와 검진을 통해 결정해야 하는 것이 좋다.
포경수술은 기원전 2400년 전 할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포경수술은 기원전 2400년 전 할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의 더운 날씨로 소변이 음경 포피에 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술을 했다고 추정한다.
그 당시 할례는 ‘청결’보다는 ‘신성’(神性)의 관점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문서 중 하나인 ‘사자의 서’에 묘사된 태양신 ‘레’(RE)는 포경수술을 한 신으로 묘사된다. 태양의 신이 할례를 받았다면, 그를 숭배하는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복속의 증거로 포경수술을 행해야 했다고 한다. 이 신전에 들어오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할례(割禮), 성스러운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으로서 ‘할례’ 문화는 고대 근동 세계로 퍼졌고, 이를 문화적으로 계승한 민족이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이집트인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할례를 했다.
“모든 남자는 할례를 해야 한다. 너는 포피를 잘라내야 할 것이니, 그것이 너와 나 사이 약속의 증표가 될 것이다. 너희 중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라. 남자는 포피를 베어 내지 아니하면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세기 17:9-14)
섬찟한 신의 경고였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련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민족을 번성하게 할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다.
창세기의 기록에 맞춰 유대인 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다. 하지만 문명은 언제나 충돌한다. ‘할례’ 문화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절대 강자 중 하나인 그리스였다. “감춰야 산다.”. 다시 ‘귀두 덮기’ 나선 유대인들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성에 개방적인 민족이었다. 운동할 때도 나체 상태로 땀 흘리기를 즐겼다. 근육질 남성의 몸을 찬미하고, 신에게 이를 바치는 행위로 여겼기에 체육관을 뜻하는 영어단어 ’GYM’의 어원이 된 고대 그리스어 ‘gymnos’(짐노스)는 ’ 누드‘를 의미한다. 그리스인의 ’ 나체‘에는 그러나 원칙이 있었다. 전부 벗되, 귀두는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귀두를 보여주는 걸 흉하다고 여겼다. 운동할 때 혹여 귀두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운동하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포피 끝을 키노데스메라는 끈으로 묶었을 정도였다.
이런 그리스인들에게 포피를 일부러 제거해 귀두를 드러낸 이집트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고대 그리스가 절대 강자로 부상하면서 유대인들도 그들의 땅에 더부살이를 시작하자 사태는 악화하였다. 그리스인의 미적 기준을 준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생존해야 했다. 방법을 고안했는데 ’ 주제움 폰둠‘. 황동으로 만든 깔때기 모양의 추였다. 남아있는 포피 쪽에 매달면, 그 무게 때문에 살이 당겨져 귀두가 다시 덮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임시방편이 불안한 유대인들은 ’ 에피파스모스‘라는 수술을 했는데, 이는 “당겨서 덮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일종의 ‘포피재건술’이다. 강대국으로부터 오는 혐오를 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또한 나치가 유대인을 가려낸 방법으로 “할례 한 남성 찾기”이다. 이로써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 그는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위대한 아리아인인 우리 독일인이 빈곤한 건 유대인 때문이다.” 이제 독일 전 사회가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처음엔 배제하기 위해서, 나중엔 학살이 목적이었다.
유대인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의 하나. 바로 할례였다. 독일 자경단들은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집을 급습했다. 그들이 유대인임을 문서로 증명하지 못하면, 그 집 가장의 바지를 벗겼다. 포경수술받은 성기가 증거라고 여겨서였다. 가장 많은 학살이 일어난 폴란드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은 이를 피하고자 포피재건술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2000년 전 수술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2000년이 지난 후에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매일경제기사 일부 발췌: https://www.mk.co.kr/news/culture/10604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