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만세
더 큰 지옥을 경험하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학교폭력 복수극으로 대표적인 작품인 더글로리가 있다. 아주 철저한 계획 속에서 함께 실현해 줄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나 화려한 복수를 펼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지옥만세는 판타지에서 벗어나 작은 10대들의 최선을 보여준다. 거대한 폭력 속에 갇힌 아이들의 작은 발걸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옥만세는 학교폭력과 사이비를 결합해 지옥 속 연대를 보여준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나미와 선우는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둘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택했을 뿐 각별한 사이는 아니다. 나미가 먼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며 말한다. "너는 내 장례식에 안 와도 돼." 선우는 무덤덤하게 듣고는 "알겠어. 너 끝나면 나도 바로 할게."라고 답한다.
- 나 먼저 간다. 너도 바로 올 거지?
- 오키오키
둘은 이어달리기 바톤을 넘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눈다. 선우의 오키오키 또한 일상에서 가볍게 쓰는 표현이라 폐목욕탕에서 울리는 이 대화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가벼운 대화와 달리 떨리는 눈동자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지금 삶이 지옥이라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내가 죽어도 가해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둘은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얼마 없는 돈을 끌어모아 학교폭력 가해자 박채린을 찾으러 서울에 간다. 유학원으로 추정되는 교회에서 박채린을 마주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박채린은 매우 선량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한다. 마치 그들의 존재만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가증스러운 미소로 대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아 점수를 얻기 위해서, 피해자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종교시설에 며칠 동안 머문다. 나미는 자신의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박채린의 얼굴에 기스 하나라도 남기려고 주머니 속 커터칼을 꺼내지만 쉽게 긋지 못한다. 선우는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박채린의 주도하에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주시한다.
나미와 선우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 온다. 나미가 주머니 속 커터칼을 꺼내 가해자를 향해 내밀었을 때 (나미 입장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를 받는다. 박채린을 용서해 주려는 나미의 모습을 보고 선우는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낸다. 이때 둘의 대화를 통해 영화 속 첫 장면으로 전환이 된다. 박채린 무리에게 괴롭힘을 받는 선우의 모습과 옆에서 살짝 머뭇거리다가 박채린 곁으로 가는 방관자의 모습이 나온다. 다리만 보였던 시점에서 얼굴로 카메라가 서서히 올라갔을 때 나미의 얼굴이 보인다.
죽음과 복수를 계획하는 사이지만, 고속버스에서 따로 앉아서 가는 그들의 거리감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너 또한 나에게는 같은 가해자였다는 것. 그런 방관자가 먼저 용서하는 아이러니함. 심지어 박채린은 선우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자신으로 인해 선우가 케이크를 싫어할 것을 알고 있는 오만함까지 보여준다.
박채린은 낙원으로 갈 수 있는 점수를 얻기 위해 공개적으로 용서를 받으려고 한다. 나미는 그런 박채린에게 확고하게 선을 긋고 선우에게 사과한다. 둘의 진심이 전달되고 다 마무리되는구나 싶었던 찰나에 살인미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야기가 풀어지는 내내 은은하게 느껴졌던 사이비 집단의 광기는 본격적으로 짙어져 스릴러물로 변한다.
둘은 마귀 취급을 받으며 박채린과 함께 감금된다. 박채린으로 인해 종교 시설에서 따를 당했던 아이는 나미와 선우가 탈출할 수 있게 몰래 커터칼을 챙겨준다. 비록 공간은 다르지만 박채린이라는 같은 지옥 속에 있던 아이의 연대 덕분에 커터칼로 끈을 끊어내고 탈출할 수 있게 된다. 나미와 선우는 박채린을 설득했지만 실패했고, 먼저 도망치다가 박채린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명호의 시체를 발견하고 다시 돌아와 박채린을 도와준다.
나를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아이에게 정신차리라며 화를 내고 부축이며 나온다. 사건의 공론화나 여러 실마리는 박채린에게 맡기고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떨어져서 다른 좌석에 앉아서 갔던 둘은 이제 같이 앉아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에 든다. 그 순간만큼은 매우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본가로 돌아오니 익숙한 지옥이 펼쳐진다. 학교폭력 가해자 무리는 여전히 그들을 조롱한다. 하지만 이전처럼 겁에 질려서 당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하고 싶을 말을 내뱉고 당당하게 맞선다. 사이비 집단 속에서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뭐가 두려울까. 나미는 선우에게 "웰컴 투 더 헬이다 씨발!"을 외친다. 어디를 가든 지옥이다. 하지만 현실 지옥을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삶을 보여준다.
사이비 집단에서 머무는 이들을 보며 조마조마했지만, 죽음 앞에서 오키오키를 내뱉는 10대라서 납득하고 봤던 것 같다. 판타지가 난무하는 복수극 속에서 약자들이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아주 작고 소중한 복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