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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Apr 25. 2022

두통


두통이 그렇게 왔다.

서 있으면, 옅어지고, 누우면 묵직하게 무게를 더 해가는 통증으로.

깊은 병은 아니라, 가벼운 증상일 뿐 믿게 되는 얄팍한 깊이 어디엔가에서.


분명 그것은 ‘임사체험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파르고 신비하고 위험했던 밤’을 얘기했던 허지웅의 통증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방사선 카메라로 내 두뇌를 직접 스캔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알고 있었다.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 무해하다는 말도 무색할 그런 정도의 증상이라는 것을.


4박 5일 병실에서 두통을 동반하고 지나는 시간의 터널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시간 분자들이 수십만배로 커져 알알이 자신을 겪어내라고 아우성 치는 듯 했다. ‘소피’의 부드러운 철학 강의도 헉슬리의 놀라운 ‘포드시대’도 놈들의 아우성을 막아내지 못했다.


진통제 좀 주세요.


세 번을 맞았다. 하지만 시간 분자가 본래 크기로 돌아가는 것은 잠시뿐, 묵직하고 기분 나쁜 통증은 여지없이 다시 돌아왔다.


진통제가 왜 효과가 없죠?


수술 후 맞았던 무통에 마약성분이 있어 체내에서 빠지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어요.


바비인형같이 생긴 간호사가 말했다.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두통이 시작된 것은 수술 전부터 였었다.


여하튼 수술 후 4일동안 나를 괴롭힌 것이 수술 부위가 아니라 마일드한 두통이란 것은 역설이다. 수술부위 따위는 전혀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수술 후 일주일 뒤 의사가 “예쁘게 꿰맸죠” 자랑하듯 보여준 복강경으로 찍은 내 속 어딘가의 모습이 잠시 생경했을 뿐이다.


무거운 시간터널의 끝에는 당연히 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롱패딩을 입은 우람한 둘째 아들, 묵직한 캐리어를 든든하게 받쳐든 채 차키를 쥐고 성큼성큼 병실을 나가는 모습을 끝으로 내 병동생활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긋지긋하게 내 머리 한 켠에 붙어 있던 두통은 내가 병원문을 넘자 함께 나섰다. 촉각으로 느껴지는 알싸한 공기의 진동이 내 두통의 파장과 맞물려 더 큰 통증의 너울거림을 만들어 냈다. 머리 속이 하얘졌다가 까매졌다. 일순 공기의 진동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얼른 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내부의 파동과 통증의 파동이 맞물려 증폭했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리듬을 같이 하여 무지근히 머리를 눌러대는 것이었다.


불현듯, 커피를 5일간 마시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왜 커피를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지?


아메리카노 한잔 하자.


근처 빽다방에 들러, 아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아메리카노를 내게 건넸다. 부드럽고도 매혹적인 커피향에 나도 모르는 새 욕구불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짝 홀짝 다섯 모금쯤 마셨을 때, 눈앞에서 흐릿한 운무가 밀려나가듯 두통이 서서히 가시는 것을 느꼈다. 몇 모금 더 마시니, 어느새 머리가 개운해 졌다. 천지에 첫 태양이 떠오른 듯, 청량한 기운이 두통이 물러간 자리를 맴돌았다.


뭐지? 생소한 경험에 놀라움과 소름이 동시에 올랐다.


서핑으로 두통의 원인을 찾아냈다. 카페인 중독의 금단현상이다. 카페인은 머릿속 혈관을 긴장하게 해서 좁게 만든단다. 따라서 혈류량이 적어지는데, 적은 혈류량에 익숙한 두뇌가 카페인 섭취를 하지 않아 갑자기 많은 량의 혈류를 감당하게 되면 두통이 난단다.


이 현상을 글이 아닌 몸으로 체화하니, 카페인이 두려워졌다. 뇌혈관과 관련된 병들이 뇌리에 열을 짓고 지나갔다. 그 중 하나가 두터운 글씨로 크기를 키워 가공할 만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알츠하이머! 죽음보다 더 두려운 병이다. 내 심연의 공포가 있다면 바로 이 알츠하이머다. 안락사의 합법화를 기다리는 것도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닌가?


카페인을 우선 줄이기로 했다. 일단 하루 100mg이내로 조절할 생각이다. 카페 아메리카노를 끊고 카누나 라떼로 대체할 생각이다. 이것도 서서히 디카페인으로 바꿔나갈 것이다.


오늘 커피 두 잔을 마셨다. 카페인 함량은 80mg 정도다. 건강한 뇌건강을 위한 첫 걸음치고, 요 며칠간 성적이 좋다.


가파른 두통으로 산을 만났다. 수술 회복기간, 의외의 복병이었다. 없었으면 천상의 회복기였을 날들, 욕심 삼아 싸매고 간 몇 권의 책들과 그 동안의 과로를 씻어버릴 며칠간의 호사스러웠을 시간들. 아까운 내 시간들. 역시 삶은 예측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모양이다. 오랜 기간 잘못된 식습관의 호된 질타였다. 배우라는 의미다. 각성하라는 의미다. 온전한 나만의 세계에서 불청객이었던 두통, 부정적인 것의 범주에서 꺼내 이로운 것의 범주로 재편해 본다. 불쾌한 경험이었지만 좋은 의미로 남을 것이다.  가치부여 자질을 가진 인간의 기억력이란 그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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