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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Nov 05. 2022

디오니소스적 긍정

데미안 (by 헤세) & 비극의 탄생 (by 니체)


원숙한 아일랜드 가수 엔야의 <Caribbean Blue>를 꽤 오랫동안 들었다. 주위를 밝히는 내면의 등을 하나, 둘씩 끄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되는 빛 만이 남았을 때, 그 밤들, 그녀의 노래는 영혼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몽환적인 목소리, 가장자리가 흐릿한 푸른 선율, 넘실대는 고요한 파동, 노래는 내 영혼을 흠뻑 적셨다. 그것은 타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느라, 또한 내 생각과 행동을 엄격한 검열 앞에 세우느라 고단했던 20대의 내 영혼, 짧은 심지의 가녀린 촛불과 같던, 불안에 초조해 하던 내 영혼을 위한 의식이었다. 소박한 사치였다.


스무번의 마법과 같은 가을 밤을 돌아, 내 손에 안착한 헤세의 <데미안>은 기억 너머의 나, 그때의 나를 소환한다. 악의 형상체 ‘프란츠 크로머’를 두고 불안해 하는 싱클레어는 그때 그 유약했던 ‘나’를 닮았다. 그리고… 그가 악이라는 관념세계를 허심하게 포용함으로써 단단해 지는 과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였던 나의 통과 제의와 유사한 일치선을 이룬다.


책장에 고요히 동면 중이었던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단단한 인연의 끈으로 묶어 준 것이, 작품 <데미안>이다. 작품을 읽어 가면서, 니체의 세계와 맞물리는 기시감에 묘한 매혹을 느꼈다. 하여, <데미안>을 읽는 동안 함께 했던 니체의 초기철학을 필터로 싱클레어의 여정을 글로 담는 것은 나에게 이 보다 더 당연할 수 없는 것이다. 늘 느끼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 글로 표출하는 것은 다르다. 가슴의 서지를 유사하게 형상할 수 있길… 내가 부여하는 살과 피로 나다운 싱클레어를 빚어낼 수 있길… 첫 독자인 나 자신이 낯선 이미지에 당황하지 않길… 하는 바램이다.




싱클레어에게는 두 세계가 있다. 부모님이 만들어 준 밝은 꿈의 세계, 빛의 세계, 이성의 세계와 두렵고 유혹적인 세계, 암흑의 세계, 망아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 세계들은 서로 경계가 맞닿아 있다. 당연히도, 이것은 싱클레어의 내면의 세계이기 때문이며, 실존하는 인간이라면 그의 본성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의 빛의 세계는 이성의 세계이며 관념의 세계이다.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 영역의 본성이다. 여기에 세상이 만들어 놓은 관념의 색채가 씌어져 있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도덕과 질서를 규정해 놓은 세계이면서 절대적인 권위의 로고스(신, 도덕)가 외압을 가하는 세계, 지배력을 가하는 세계다. 니체에 의하면 의식 영역의 이성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싱클레어가 빛의 세계라 일컫는 곳은 실상 로고스의 지배 하에 있는 아폴론적 영역이다. 암흑의 세계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감성의 영역이므로 유혹적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이야 말로 거부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다.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 이성의 판단에 따르니 이 영역은 소란하고, 음침하고,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것, 즉 “악”으로 규정된다. 신은 인간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금욕만이 “선” 이다 외쳐대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의 싱클레어는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 눈으로 두 세계를 바라보던 아이였다..


이 세계가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신 디오니소스의 화신인 듯, 데미안의 자극으로 싱클레어는 자신이 보는 세계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 생겨난 의혹의 균열은 점점 커져 결국 싱클레어의 내면, 로고스 중심의 세계를 해체한다. 그 위용은 에코의 책, <장미의 이름>에서 권위의 상징인 장서관이 불꽃 속에서 스러져가는 장관을 방불케 한다. 니체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 한 것을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궁극적으로 데미안이 열어 준 새로운 시계로, 로고스센트리즘이 파괴된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흐름인 것이다.


싱클레어는 아폴론의 영역을 떠나, 망아의 세계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빠져들게 된다. 술집 출입도 잦고 행패도 부리고, 냉소로 친구들을 놀리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늘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하며, “냉소하는 모든 것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울며, 내 영혼 앞에서, 내 과거 앞에서, 어머니 앞에서, 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101).”고 말한다. 여기서, 아폴론적 관조를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 의식이 지배하는 아폴론적인 것, 감성, 무의식이 지배하는 디오니소스적 인 것 두 가지 모두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한 쪽 만을 택해서는 진정한 자아에 이르지 못한다.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락을 얻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욕망에만 자신을 맡기는 것이 내밀한 자아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이성의 관조가 작용했을 것이다.


멀리했던 아폴론 적인 것을 다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베아트리체의 등장이다. 이상적 상을 가진 그녀는 싱클레어에게 성소를 열어 주고 자신만의 교회를 짓게 한다. 부모님이 만들어 준, 로고스가 지배하는 빛의 세계가 아닌, “자신이 창안하고 요구한 새로운 예배, 책임과 자기 기율이 있는 예배”의 교회다.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던 여성상은 망아의 시절 친구들의 입으로 회자되던 은밀한 성이 아닌, 외경과 숭배의 대상, 빛의 영역에 드리워진 꿈이다. 이것이 바로 베아트리체의 존재가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추동원’인 이유다. 싱클레어가 쌓아가는 새로운 세계는 아폴론 적인 꿈과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합일을 이루고, 진정한 자아를 구축하는 세계다. 알을 깨고 나와 조우하는, 자신이 중심이 된 세계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창조하는 자’가 등장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는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며 그의 도덕은 “개인의 자기극복을 위한 싸움과 투쟁”이다. (출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 표현 길잡이) 싱클레어는 ‘창조하는 자’의 면모를 지닌다. 그들만의 표식을 가진 자, 자아와 하나가 된 자, 자신만의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는 자인 까닭이다.


그의 자아에 대한 긍정에너지는 니체의 말로 ‘힘에의 의지’가 느껴진다. 이 의지는 순전히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위해 상승하는 에너지다. 이것은 내 뛰는 심장과 파장이 같다. 내 자아가 무엇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식한 그날부터, “바깥 세계가 나의 내면세계와 어울려 순수한 화음(183)”을 내었고, “내가 한 행동이란 모두 영혼에 딱 맞는 의상(<소설의 기법>; 29)이 되었으며, 세상과 대비되는 문제적 갈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내 속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품은 것 만으로 말이다.

   

니체는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 된다.(<비극의 탄생>;99)” 하였다. 나와 마찰되는 세상에서 나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포용하는 내면의 힘,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 일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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