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한 Mar 04. 2021

결혼, 그 지나친 망상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오늘 은행에 통장 개설하러 갔는데, 행원이 계속 나한테 웃어주더라?  이제 신혼집 알아보면 되냐?"


친한 동창 남자애가 보내온 카톡에 '미친놈..ㅋㅋㅋ'하고 육성으로 웃음이 터진다. 예쁜 여자가 웃어주면 남자는 신혼집부터 알아본다는 농담에 헛소리한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사실 나 역시 지나쳐갈 인연에게 쉽게 지나친 기대를 걸어본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왜냐? 난 누구를 만나든 늘 진심이었으니까. 그것은 내가 서른이 넘어서,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여서, 혹은 결혼이 급해서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도 지나친 망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힌 적이 있다.


내 나이 스물한 살, 그 당시 외국에서 짧은 기간 동안 만났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어쨌든 동양인과 결혼하고 싶어'라는 가벼운 의견을 내게 전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그 말뜻을 구태여 분석하며 섭섭한 감정을 끌어올려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동양인이긴 하지만, 내가 아닌 동양인이 너무 많잖아!' 내 눈물의 이유는 그가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해서였다. 물론 몇 달 뒤 이별을 통보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것은 나였지만 말이다.


내 연애 역사상, 그 경험은 두고두고 '순간의 감정에 파묻혀 오버하지 말자'라는 큰 교훈을 주었다. 그 교훈 덕분에 오버스럽게 눈물을 쏟는 일은 극히 줄었지만, 여전히 첫만남에서도 지나친 망상을 끊기란 어렵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늘 진심이니까. 그것은  마치 '로또 그거 뭐 되겠냐?'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일과 같다.


한 번은 소개팅 어플에서 대만 혼혈이라는 남자와 매칭이 된 적이 있다. 아빠가 한국인이고 엄마가 대만인이라는 그는 대만에 살다가 한 달 전부터 한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요트 부품 사업을 하고 있고, 곧 한국에 지사를 낼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거창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이번 여름에 한강에서 요트를 태워주겠다고 내게 말했다. 요트? 그거 뭐 되겠냐?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진심으로 바라고 기대했다.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이틀 만에 나는 국제결혼이라는 지나친 망상을 해본다. '아 혼혈이라고 하면 국제결혼으로 쳐야 하나? 반은 한국인인데?'라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하는 생각인데도 누구에게 들킬까 봐 민망해하는 순간, 대만 혼혈남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보내 왔다.


"아.. 이걸 어떡하지? 곤란하네.. 세원 씨, 내가 한국에 친구가 없어서 그런데, 부탁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그 부탁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열이 뻗쳤다. 내가 이제 하다 하다 보이스피싱과의 사랑을 꿈꾸었구나. 어디서 저렇게 딱 대만 혼혈 느낌의 사진을 가져다가 도용한 걸까. 내 예상대로 그는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링크를 보내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다. 지난주에 강원랜드에 가서 2억을 잃었고 10%의 적립금을 돌려받았는데, 그것을 현금화하도록 도와주면 나에게 절반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야이새끼야, 사기를 치려면 좀 정성을 쏟아야지, 5년 만난 남자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해도 목을 칠 마당에... 성의 없이 이틀 만에 이따위 부탁을 들어줄꺼라고 생각한 건가.


그래도 나는 이틀간 속은 것이 열 받아서 순순히 그의 요청을 들어주는 척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절대 링크를 누르지 않았으며 그가 시키는 것은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 아주 협조적이지만 아주 컴맹 인척을 하며 계속 시간을 끌었더니 그는 장난하냐며 내게 화를 냈다. 나는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다시 해보겠다고 여지를 주다가, 곧 내 거짓말도 들킬 것 같아서 얼른 차단을 했다.


나는 휘성이 오열하며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 어쩐지 슬프기보다는 좀 웃기다. 아마 내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지나간 인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너와 결혼 준비까지 했어'보다 그저 생각만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보이스피싱을 당하지 않은 것도 무척 다행이고).


다만, 앞으로 몇 명이나 더 내 망상 속에서 식을 올리고 미래를 함께 할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입으로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속으로는 진심으로 바라고 결국 실망하는 일, 그것을 몇 번이나 더 해야 할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매거진 소개 - 30대 연애 표류기

연애가 하고파 소개팅 어플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견주어봅니다. 그로 인해 나의 세계가 확장될 때에는 생각을 글로 남겨둡니다.

이전 16화 틴더 왜 하시는 거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