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한 Sep 05. 2020

그 남자의 초(初)능력

달도 별도 따다 줄 건가요?

‘엔드게임’ 이후 변화된 세상.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학교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안 그래도 가라앉고 있다는 베니스를 다 때려 부수고 난리인가. 피터가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종탑 끝에 매달려 거미줄로 손을 써보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쯤에서 나는 먹던 팝콘을 들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혼자 보러 와서 다행이군, 누구랑 같이 왔다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테니,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액션 히어로물에 흥미가 없다. 마블 세계관을 몰라도 적당히 즐기기 좋은 오락영화라고 추천해준 내 친구는 영화 중간에 나왔다는 내 말을 듣고 ‘마블알러지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들도 심드렁하게 보던 그 시기에 만난 한 남자가 있었다. 틴더로 만난 그는 (좀 늙어버린) 유명 아이돌을 닮았었다.


첫 만남에 그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담아 자꾸만 웃었고,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우리는 히어로가 나오지 않는 영화를 봤고 마른날인데도 막걸리에 파전을 마셨다. 집에 가는 길에 그가 '버스정류장까지 세 블록 남았는데 거기까지 손 잡아도 돼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밌는 말도 아닌 그 말에 나는 깔깔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은 감각이 어색하고 쑥스럽고 불편하고 그리고 따뜻했다.


며칠 뒤 우리는 다시 만나서 그가 예약했다는 소고기집에 갔다. 그가 능숙하게 주문을 했고 아주머니가 더 능숙하게 고기를 구워주셨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칵테일바에 갔다. 바에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내가 보름달이 예쁘다고 말했더니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예쁘네요, 대답했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라 더 설레어서 웃음이 났다.


칵테일바에서 나는 갓파더를 시켰고 그는 롱티를 시켰다. 뭔지도 모르고 '대부'를 만난 나는 연신 얼굴을 찌푸렸고 그때마다 나를 보는 그도 비슷한 얼굴을 만들었다. 억지로 마시지 마요, 하고 그가 웃었다. 그리고 잔을 잡은 내 손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그날 그는 강남에서 일산까지 택시를 타고 나를 데려다주고 자기가 사는 강남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우리가 사귀기로 한 이후로 어디서 데이트를 하든 나를 무조건 택시로 데려다줬다. 합정, 을지로, 잠실 어디서 만나든. 보고 싶다는 말을 숨 쉬듯 하고, 만나면 나에게 무엇이든 해주려 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늘 내가 기분 좋을만한 반응과 대답을 보여줬다. 나에게 그는 시간도 에너지도 돈도 아낌없이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3개월 만에 나에게 돌연 이별을 선언했다. 나에게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며 맞춤정장을 주문하기 위해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골랐던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이별의 징후도 없었다. 뉴스속보 같은 이별통보에 어안이 벙벙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미친놈인가.. 상황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 꿈이 아니었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이별을 실감하며 무너져 울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빼앗긴 어린애처럼 억울함과 분함으로 며칠을 그렇게 울었다. 어쩐지 초반 텐션이 너무 높더라니..


사랑의 도파민이 사람을 어떻게 초(超:뛰어넘을 초)능력 인간으로 만드는지 나는 안다. 사랑의 열병으로 밤에 잠 한숨 자지 않고, 아침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이의 얼굴을 봤다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래도 나는 도파민의 유효기간을 생각하며 그도 곧 정상 텐션을 찾겠거니 생각했다. 정상 텐션이 아니라 저세상 텐션에서 바로 저세상을 갈 줄은 모르고.


나는 그 남자의 초(初:처음 초)능력을 생각하며 연애하는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설렘을 우선시하는 도파민형 인간과 편안함과 안정감을 중시하는 옥시토신형 인간. 사랑의 유희에 즐거워하다가 불꽃이 사라지는 순간에 따분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설렘에 에너지 소모를 느끼고 서로를 품어주는 온기와 편안함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만났던 백일 동안 선녀 옷을 감춰둔 나무꾼처럼 나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도파민 말고 시간이 우리를 묶어줄 거야, 나는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설렘보다 안정을 추구한다는데 그는 한창인 청년의 마음을 가졌나 보다.


그래도 그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명확한 선도 악도 없으니까. 그는 그의 방식대로 했고 그게 나랑 잘 안 맞았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훈도 없다. 이다음에 누구라도 나에게 '달도 별도 따준다'고 말하면 그것이 초(超)능력이든 초(初)능력이든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경계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이전 07화 틴더남, 니가 왜 거기서 나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