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너였다.
오래된 고택을 개조해서 만든 맥주집에서 이탈리아 식전주로 유명한 아페롤을 팔았다. 고택 마당에는 사람들이 캠핑용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마른안주를 뜯었다. 야외테이블은 가을 성수기를 맞아 꽤 붐볐는데, 우리는 들어서자마자 운이 좋게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둘 다 낮은 캠핑용 의자에 드러눕듯 앉으며 끙하는 소리를 냈다. 낮동안 무덤들과 첨성대를 보며 옛 수도 이곳저곳 헤맸다. 가을 경주는 운치 있었고, 볼거리가 많아서 저녁노을이 질 때쯤엔 달콤한 피로감이 함께 밀려왔다.
다리가 편안해지자 이내 오감이 열리고 배경음악이 귀에 들려온다. 그런데 트렌디한 이 고택이 노래 선곡은 어딘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십수 년이 지난 발라드라니. 요즘 애들이 많이 듣는 힙합이나, 아니면 오히려 고택에 어울릴 정도로 더 옛 노래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어정쩡하게 세월 지난 노래를 들으니 그저 내가 어정쩡하게 나이 먹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뭐야, 이게 벌써 나 스무 살 때 듣던 노래다.’ 그 옛날에도 이미 성인이었다니.
십수 년 전부터 마시던 오비맥주를 그날도 몇 병 비웠다. 맥주 라벨 속에 그려진 복고 트렌드의 오비베어가 깜찍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데 역시 어정쩡하게 세월 지난 노래가 또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기도해요. 사랑이 우스운 나이까지 단숨에 흘러가길.'
가사를 아로 세기며 들어본 적 없던 노래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멍청한 소리가 아닌가. 사랑이 우습고 싶어서 중늙은이가 되고 싶다? 아니, 그보다도 상늙은이가 되어도 사랑이 우스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날 그 노래를 함께 들었던 그와도 사랑 비슷한 것을 했고 한때 나의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그리고 또 이별을 했다. 당연히 서른다섯에도 사랑은 우습지 않았다. 결국 사랑과 이별이 하찮아지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않는 방법뿐이었던가. 그러니 나는 여전히 사랑이 우습고 싶지는 않다. 물론 늙은이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다.
High Risk, High Return
그는 큰 성공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인지 이제는 알 수 없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다시는 아픈 이별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는 지루한 인생을 사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새 또 나는 우습지도 않은 사랑에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뒤돌아 보면 세월이 단숨에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떤 나이에 도달해서 사랑이 우스울 수 있는지 아직은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다.
노을 - 전부 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