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으로 남아있니?
종로의 어느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뒤집으며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연애는 둘이 하는 것 같지만 두 사람 뒤에는 각자의 지나간 연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붙어있는 게 아니겠냐고.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았다. 꽤나 기괴한 것이었다. 뒤에 전 남자 친구들의 영혼을 이고서 나는 한 남자와 마주 앉아있다. 그 역시 전 여자 친구들의 영혼을 뒤에 줄줄이 달고 있다. 그것들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 가끔 죽지도 않고 또 왔구나... 싶도록 늦은 밤 안부를 물어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후배의 말에 격하게 동감했다. 정말이다. 지난 연인들은 나를 바꾸었다가, 결국 나였다가, 마지막에는 늘 내 안에 묵직한 것들을 남기고 떠났다. 어떤 사람은 음악 취향으로 남아있고, 어떤 사람은 커피 취향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내가 걸러내야 할 요소로, 또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군가의 현재를 알기 위해 과거를 물었던 적이 참 많았다. 그대의 지난 연애와 이별은 어땠나요. 그것은 나의 첫만남 공식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십 명이 되는 나의 틴더남들이) 어떤 감정을 실어서 그것들을 내게 말해주었다. 미안함이나 원망처럼 나쁜 것도 있고 고마움이나 애틋함 같은 좋은 것들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를 너무 구속하는 것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스타벅스에서 만난 수십 번째 틴더남이 내게 말했다. "어땠는데요?"라고 물었다가 나는 이내 구속의 정도를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연락이 한 시간 정도만 안 되어도 싸웠고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더 화를 냈다고 그 틴더남은 말했다. 그 상대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생각해본다. 직접 마주 보고 부딪히고 맞서던 연인들은, 이별 후에도 서로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평행선을 걷게 되는 걸까.
"저는 그 사람이 너무 예민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졌어요"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고 끝까지 반박했으나, 나는 아직도 그렇게 기억한다. 그 사람은 나를 무례한 말투와 예의 없는 행동을 일삼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와 헤어질 때도 쓸데없이 그의 속에 남겨질 내 모습이 걱정되었다. 내 글과 말에서 묘사될 그의 모습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비난들을 복기하며 하소연 하자 내 친구는 '그게 다 사실이라면 너 사회생활 가능한 거냐?'라며 우스운 위로를 했다.내가 이 감정적인 싸움에서 객관적 일수 없는 사람이어서, 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전부 내편이었다.
그는 늘 내 글쓰기를 응원하고 퇴고를 도와주었으며 여러 도전에 동기부여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늘 좋은 기억만 가져갈 거야'라는 다짐을 했으나, 서로 부딪혀서 싸운 것이 마지막이었고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마지막은 잊히지 않았다. ‘너와 나는 정말 달라’라고 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내가 맞아.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문장들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다른 걸 인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별뿐이었는데 이별 후에도 나는 그의 일부분을 영원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전에 만난 연인으로부터 일본 재즈힙합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누자베스의 슬픈 듯 경쾌한 멜로디에 그는 책상 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나도 자연스레 가끔 그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는 나에게 몇몇 도시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내가 맛집을 고르는 방법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서로에게 맞출 수 없었던 지나간 관계로 이 글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나는 무엇으로 남아있니? 가끔 아무짝에 쓸모없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