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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an 18. 2023

엄마와 할머니

고부갈등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싫은 사람과 같이 일하거나, 싫은 사람과 같이 살거나. 엄마는 집안일이 일인 주부였고, 할머니와 오랫동안 같이 살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동아들과 결혼한 탓이었다. 글씨를 막 읽을 줄 알게 되었을 때 아빠의 연애시절 러브레터 같은 걸 본 적이 있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어린 아빠는 집에 있는 아빠와 좀 다른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땐 아주 많이 사랑했겠지? 내가 그들을 고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과 달리 엄마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으니까. 분명 아주 사랑해서 골랐을 거다. 물론 그 러브레터와 연애시절 사진들은 엄마가 죄다 내다 버려서 지금은 집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내가 구구단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 구구단에 있는 가장 큰 숫자가 할머니의 나이였다. 그러고도 22년을 더 사셨다. 그리고 그중에 절반 이상은 요양원에서 보내셨다. 별로 없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 중에 좋은 기억은 거의 없다. 어린 시절 주로 부엌이나 식탁에서 엄마와 대립하던 모습이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한 번은 반찬 타박을 하며 할머니가 젓가락을 던졌고 엄마가 그 앞에 국그릇을 내려놓다가 식탁 유리에 금이 갔던 적이 있었다. 유리가 쩍 갈라지던 그날뿐만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 사이는 늘 냉랭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다. 딸은 모두 엄마 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아빠도 할머니를 힘들어했고 동네 노인정에서도 괴팍한 노인네라고 금세 소문이 났다. 젊은 시절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돈을 뜯어냈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병이 생기고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뒤로 추석이나 설에는 언제나 아빠와 언니, 나, 셋이서만 할머니를 보러 갔다. 요양원은 멀리 있었다. 가까운 곳에 모시면 요양원을 제멋대로 나와서 집에 돌아왔던 적이 두번이나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볼 때마다 더 늙고 더 작게 쪼그라들었는데, 기억만은 또렷해서 이종사촌의 안부까지 묻곤 했다. 하는 일이 뻔한 그곳에서 용돈을 더 달라고 아빠를 보챘고, 옷가지들을 쌓아두고 버리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방문을 마칠때쯤에 엄마는 잘 있냐고 꼭 물어봤다. 엄마는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는데도 병이 낫지 않았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가장 오래 살아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는 엄마도 함께였다. 할머니는 이제 너무 늙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휠체어에 탄 채로 나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아직도 많은 기억을 붙잡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의사는 할머니가 몹시 노쇠했지만 치매는 없다고 진단했다. 엄마는 같이 살던 때보다 조금 선해진 말투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문장들이었다.


할머니는 103살에 돌아가셨다. 마침내라고 생각할 만큼 오래 끌어온 죽음이었다. 장례식장에 놓인 사진 속에 할머니는 끔찍하게 유치한 꽃장식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요양원에서는 다 늙은 노인에게 왜 저런 걸 달고 영정사진을 찍게 하는 걸까. 할머니는 머리에 꽃을 달고 이틀간 조문객을 맞았다. 찾아오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발인 날 엄마는 뜬금없이 어릴 때 할머니가 나에게 간식을 챙겨준 것에 대해 말했다. 할머니가 너한테 참 잘해줬지? 그치? 그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엄마에게 어떤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죽음은 너무나 거대한 것이라서 싫은 사람의 기억을 희석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갖게 되는 걸까. 엄마가 아주 오래 품었던 미움은 사라진다기보다 무력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엄마 옆에서 엄마를 따라 할머니를 미워했었는데, ‘할머니가 너한테 참 잘해줬지?’ 하고 말할 때, 죽음 뒤에 할머니를 따뜻하게 평가하는 일은 나에게 영정사진 속 꽃장식만큼이나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할머니 모습을 떠올려본다.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이 끝장이구나라고 생각했을까. 미움받거나 미워하는 마음도 끝장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죽음이 모든 걸 끝장낸다‘는 말은 당사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잊고 살던 할머니를 극명하게 떠올린다. 엄마가 응급실 대기 의자에 앉아 ‘젊은 시절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나,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에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치워버릴 때, 아빠와 다투는 원인이 아직도 그 옛날에 머물러있을 때. 그럴 때는 미운 사람의 죽음이 미움의 죽음과 불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언니가 대학시절 사학수업 과제를 준비한다고 할머니를 함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할머니의 설명을 녹취하고 자료로 쓰려는 듯했다. 그때는 아직 할머니가 말을 또렷하게 했고 이따금 일본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근황을 얘기하던 할머니는 옆자리 할머니에 대해 우리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 노인네가 나한테 오천 원을 빌려갔는데, 안 갚고 죽었잖아.‘ 할머니가 입을 삐죽거렸다. 옆자리 식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보다 빌려준 그 오천원을 다시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애석해하는 할머니를 보며, 언니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더 추하게 만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죽음은 무조건 슬프다거나 모든 걸 용서하고 추모해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얼마간 당황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두려운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구나, 그뒤에 남겨지는 어쩌지 못하는 감정들이 더 무섭다, 나는 생각했다. 어떤 생각의 고리가 연결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나는 장기기증을 신청했다. 미워했던 할머니와의 화해, 그 대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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