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게 뭘까
내가 너무 조심스러운 사람들만 만났던가? 서른을 넘어서는 연인사이가 되어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땐 사랑이 넘쳐서 목구멍으로 뱉어내지 않고는 못 베기는 순간들이 더 많았는데. 점점 그 말을 뱉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사랑이 무르익기 전에 혼자 급발진하는 게 아닐까 경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상대가 '엥? 나는 사랑까진 아닌데?'라고 하면 어쩌나), 어릴 때와는 달리 사랑이 더 무거운 어떤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사랑을 하는 건 본래 어려운 것이니, 그 표현도 어렵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서른셋에 만난 남자친구가 처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을 기억한다. '좋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은 흔했고, 보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달려오는 것도 쉬웠지만, 우리는 한참 동안 사랑한다 말하기를 미뤄두었다. 함께 밤하늘을 보는 날에는 끌어안기 바빴고, 애정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묻는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장난처럼 '나 좋아해?'라고 묻는 말에, 그가 불쑥 대답했다. "나는 사랑하는 것 같은데?" 눈을 마주치고 배시시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문장을 곱씹으며 그와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을 뿐. 나는 아주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르익었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그의 한마디에 우리 관계는 한 단계 더 깊어진 것 같다고 느끼며 진심으로 기뻤다.
그러나 그 뒤로 내가 자주 사랑한다 말하게 되는데 반해 그가 먼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4개월 만에 별안간 헤어지게 된 이유가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나는 서른넷, 그는 서른다섯이 되던 해였다. 가까운 친구들이 신년계획에 끼워서 결혼계획을 물어왔다. 동기 결혼식에서 만난 지인들이 아직 미혼인 친구들을 눈으로 셌다. 더 늦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말하는 친척들을 설연휴에 만났다. 그 분위기에 휩싸여 나는 내 나이 서른다섯 전에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새해 심경을 그에게 전했다. 그는 내 결혼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확한 이유 없이 그는 나에게 이별을 말했다. 나는 혼자 짐작했을 뿐이다. 그가 헌신이나 책임 없이 열정만으로 사랑하고 싶었다는 게 이별의 이유였을 것이라고.
예전에 5년을 만났던 남자친구는 원체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었다. 어릴 때 광안리에서 꼴랑 6개월 살아놓고는 고향이 부산이라서 무뚝뚝하다는 헛소리를 했다. 좀 다정했으면 좋겠다는 내 불평에 어떻게 더 친절하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하곤 했다. 건물에 들어갈 때 문을 잡아주거나, 식당에서 수저밑에 냅킨을 깔아주는 것이 연인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섭섭함이 몰려오면 내가 좋아서 잘해줬던 일들까지 떠올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단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렵나? 돌려 말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다정함이 부족하면 사랑한다는 멘트라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그에게 수십 번이나 말했었다. 그런데도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어서 그것은 매번 싸움의 원인이 됐다. 그렇게 섭섭해서 눈물을 짜냈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5년 6개월이나 그의 옆에 붙어있었을까?
클라우드를 정리하다가 그가 보내온 음성파일을 발견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으로 시작해서 '사랑해~'로 끝나는 그 음성파일은 독도의 밤하늘 사진과 나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그가 독도로 3박 4일 동안 영상촬영을 갔을 때 보내온 것들이었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고, 출장 때문에 같이 생일을 못 보내서 아쉽다고, 서울 올라가면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보내자는 뻔한 내용의 음성편지였다. 사진 속에는 새까만 돌섬 위로 진주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것들이 경이로운 은하수를 만들고 있었다.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찍은 귀한 사진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아름답고 귀한걸 나에게 보여주고 싶고, 사랑한다고 넘치게 표현하고 싶었던 적이 그에게도 있었다.
어두운 연희동 밤골목에서 그가 머뭇거리다가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내가 우리 사이는 왜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지 원망에 사무쳐서 그를 다그칠 때, 그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었다. "사랑하면... 그러면 그다음도 있어야 하니까. 나는 널 사랑하지만 모아놓은 돈도 없고 결혼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잖아.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나는 연결이 느슨해 보이는 그의 말들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에게 사랑한다면 곧 결혼해야 한다고 압박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반드시 미래를 함께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이다. 5년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미래에는 그가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마흔에 가까워지는 나이와 변함없는 가난함은 사랑한다는 말을 삼키게 만들었다. 그 말에 자주 따라붙는 행복하게 해 준다는 약속 역시도. 그렇다면 그는 책임감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이런 경험들이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만들어 냈다. 누군가 물으면 '사랑은 상대에게 책임감이 생기고 자연히 그 책임을 다하게 되는 일'이라고 나는 정의 내렸다. 한창 해맑게 사랑할 때는 그저 이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했었는데, 사랑이 끝난 뒤에는 진정한 사랑의 정의가 자꾸만 수정되었다. 열정만 가지고 풋사랑을 하던 때는 지났다. 나는 삼십 대의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