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으로 쓰고, 살아야지
내가 제적회원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도서관을 반년 넘게 사용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 도서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집에서 10분, 바쁜 걸음으로 가면 6분에도 돌파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시민들을 위한 넓은 공원을 옆에 끼고 뒤로는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 앞으로는 편의점을 두고 있었다. 도서관 앞은 늘 사계절에 맞는 꽃화분이 놓여있었는데, 심지어 꽃 특성화 도서관으로 지정되어 복도와 서가에도 꽃과 식물이 장식된 사랑스러운 도서관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도서관의 제적회원이라니!!
그간 서가에 앉아 공부하는 것은 따로 회원자격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 컴퓨터를 쓸 일이 생겨 예약을 하려고 보니, 십수년 전에 가입된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서너 번이나 오류가 났다.
“선생님 제적회원이시네요.”
도서관 직원은 나를 제적회원이라고 불렀다. 그간 서로 썸 타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상황이 이런 걸까? 왜요, 왜, 나만 왜 진심인 건데? 하고 따져 묻는 상상을 하는데 도서관 직원이 뒤이어 설명했다.
“15년 전에 대출하시고 미반납하신 책이 있어요. 책 제목이 중국현대사네요.”
그때 불현듯 생각나는 중국현대사 교수님의 얼굴. 재수강하지도 못하는 점수 C+를 주셔서 너무한다고 생각했지만 ‘니 시험지가 더 너무하다’고 말씀하셨던 그때 그 교수님. 벌써 15년 전의 일이었다. 변변찮은 중국현대사 점수만 뚜렷하게 기억나고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책도 안 읽고 심지어 뭘 빌렸는지도 잊고 술이나 퍼마시며 놀았었겠지.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주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집에 가서 찾아보겠다고, 없으면 책값이라도 지불하겠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행여 많은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우리의 대화가 새어나갈까 봐 조심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서관 직원은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또 다른 직원에게도 내 얘기를 하며 후속처리에 대해 상의를 했다. 15년동안이나 책을 반납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 오는 뻔뻔한 여자의 이야기가 시립도서관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그동안 그 뻔뻔한 여자는 도둑질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침울한 얼굴로 처분을 기다렸다. 직원들 모두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것 같아서 안면이 따가웠다.
‘반납 또는 책값 지불(심지어 감가상각을 적용해 주겠다고 했다) 이후에 6개월간 대출정지’
처분은 어느 종교의 성인 못지않게 관대했다. 15년이나 연체했는데 6개월 대출정지라니. 직원은 되려 나에게 대출이 정지되는 기한을 설명하며 안타깝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친절하던지. 나도 다시 고개를 숙여 몇 번 더 죄송하다고 사죄를 했다. 15년이나 책을 반납하지 않은 뻔뻔한 여자가 이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시립도서관 사이에 퍼지길 바라면서.
사실은 완전히 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 잊었다고,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좀 덜 부끄러우니까 변명을 해댔지만, 나는 그 반납하지 않은 책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내용은 정말 기억 안 난다.) 반납을 정말 까먹었던 시간이 지나고, 귀찮아서 미루던 시간이 지나고, 실수를 바로잡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도 잊은 척하면 도서관도 잊지 않을까(??)하는 멍청한 생각으로 뭉개는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15년이 지난 것이다. 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은 책이 떠오르면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양심의 가책이 떠오를 땐 더 나쁜 범죄도 15년이면 공소시효가 끝났겠다고 자위하며 도서관을 뻔뻔히 사용했다. 제적회원이 된 줄도 모르고.
다음 달이면 나는 다시 정상적으로 회원자격을 되찾는다. 시험이 끝난 후 더 이상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서 공부하지는 않지만, 이제 보고싶은 책을 대출하거나 디지털좌석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이용규칙에 대한 처벌은 고의과실을 따지는 것에 실익이 없으니, 고의로 15년을 버틴 나도 실수로 반납 못한 사람과 동일한 처분을 받는 것일 터였다. 나는 지금 글을 쓰는 이순간에도 계속 '반납하지 않은 책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다'고 거짓말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고의성이 있는 행동은 더 나쁘게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알고도 짐짓 모른척하며, 작은 일이니까 괜찮겠지 치부하고 행동했던 과거들을 은근슬쩍 덮고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진실된 글을 쓰고 양심을 복구하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 거짓으로 쓴 글은 언제나 볼품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좋은 글을 쓰는 사람 중에 비양심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라 나는 감히 확신한다.
그리고 나도 한번 받았으니, 언젠가 한번 돌려주고자 다짐한다. 누군가의 잘못을 보면 상대방의 양심을 믿고 도서관처럼 포용해줄 것을. 물론 약간의 대출정지기간이 있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