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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Oct 11. 2020

헤어질 거면 오천 원

틴더 연애 표류기

틴더남 스토리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특이했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밀크티남' 이야기이다. 밀크남의 프로필 사진에는 다소 흐릿하지만 밝게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늘 그렇듯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실물보다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내 상상력이 채워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의사라고 소개했다. 다시 보니 흐릿한 사진에서도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며 내 카톡아이디를 받아갔다. 그 설명의 내용은 그가 교도소에 있다는 것, 수감자가 아니라 병역의무를 대신해 근무중이라는 것, 그리고 근무중에는 틴더 메시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흘이나 대화를 나눴다. 그는 퇴근길에 전화를 하기도 했고, 성시경 성대모사 따위를 하며 (잘자요~) 썰렁한 장난을 쳤다.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만나기도 전부터 개인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들려주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나로선 정말 특이하고 생경한 이력들이었다. 그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자면 '내가 지금 인간극장의 주인공과 대화하고 있는 건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가장 필요했던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까지 암으로 잃고 고아가 됐다. 그래도 똑똑했던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서 명문대 공대에 합격했다. 야심찬 그는 고작 대학교 2학년의 나이에 작은 회사를 차렸다. 본인 말로는 직원이 7명이나 있었고 꽤 큰돈을 만질만큼 회사가 잘됐다고 했다. 그런데 왜 불행한 일은 그에게 그렇게 꾸준히 생겼는지. 회사를 확장하려던 시기에 사기꾼에게 큰 돈을 뜯기고 부도를 맞았다고 했다. 그는 큰 빚을 지며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고 회사를 접었다. 그뒤로 사업이라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깨달음을 얻고 인생의 노선을 바꿔서 의과전문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머리가 매우 좋거나 진짜 상당한 악바리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의 굴곡이 남다른 그에게 나는 연애를 기대하기보다는 위기극복에 관한 강연이나 인생철학에 대한 연설을 기대했어야 맞았는지도 모른다. 근데 그것을 기대했더라도 만족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약속을 잡을때 그가 제안했던 곳은 서울의 야경이 멋지게 보인다는 여의도의 한 호텔 루프탑바였다. 칵테일을 마시며 야경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연애승률을 높여주는 것이겠지만, (과연?) 내 빠듯한 일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겠냐고 말하며 그는 내가 사는 동네에 찾아오기로 했다. 근무지에서 그가 얹혀살고 있다는 친척집 사이에 내가 사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나는 역근처에 위치한 탐앤탐스에서 만났다. 실물은 당연히 내가 상상했던 것에 미치치 못했다. 그러나 당연한 실망에도 사람은 역시 어깨가 축 처지는 법이다. 그의 어깨도 약간은 내려간 듯 싶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메뉴판앞에 섰고, 그가 나에게 뭘 마실 거냐고 물었다. 나는 밀크티를 골랐고 그도 그랬다. 나는 그가 계산한 밀크티를 마셨다. 


밀크티남은 밀크티를 마시며 대뜸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 질문의 내 행복을 묻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하고싶은 말이 꽤 많아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행복의 반대, 불행에 대하여. 그는 한참 본인이 느낀 불행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의 불행한 과거를 듣는 내내, 나는 그것이 옮기라도 하는 것 처럼 어깨를 움치렸다. 잘되던 회사를 망하게 한 사기꾼에 대해 얘기할 때는 심지어 눈에 살기가 느껴졌다.


2억, 치과 차리려면 최소 2억은 있어야 돼요.

나는 그냥 '네 그러세요?' 라며 적당한 리액션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어쩌라고?' 생각하며.

내가 에어비앤비 경험에 대해 말했더니, 본인도 이태원에서 운영해볼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기는 게이들이 오면 샤워기로 관장을 한다고 해서 못하겠더라고요.  

침묵.

그 다음으로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교도소 내의 강간사건에 대해 얘기했고, 나는 미간을 찌푸릴수밖에 없었다. '아 얘는 뭐 이렇게 더럽게 재미없으면서 더러운 얘기만 하냐.' 불쾌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손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규칙대로 구구절절한 설명 은 생략하고 답장이 없으면 그도 그런 줄 알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규칙 좀 달랐던 것일까. 몇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다가오자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너 나랑 연락 안 할 거지? 어제 먹은 밀크티 값 오천 원 여기 계좌로 보내줘.

그리고 은행명과 계좌가 적혀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 생각했다, 와 이거 진짜 대박 재밌는 스토리로군. 그의 마지막 문장과 계좌번호는 내 무용담의 증거처럼 캡처되었고,  조선시대 전기수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이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거봐 계좌번호까지 보낸 것 좀 봐... 대박이지..?


그는 기분이 나쁜 것을 만회하려고 나에게 오천 원을 달라고 한 것일까? 오천 원이 내 이름으로 입금된 것을 받았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기분이 좀 풀렸을까? 정말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 질문들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지 않고 결투신청의 의미로 받아들일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내가 먹은 밀크티 값을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주 잠깐 측은해서 그의 밀크티 값까지 보낼까 했다가 그것도 오해할까 봐 그만두었다.


그나마 탐앤탐스에서 밀크티를 마셨으니 망정이지 호텔 루프탑바에서 만났으면 어쩔뻔했나. 그랬으면 계산이 꽤나 복잡해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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