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에는 에너지가 든다.
소개팅이든 소개팅 어플이든 남녀가 연애를 목적으로 처음 만나면, 보통은 Go 인지 Stop 인지 처음 10분 안에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Stop버튼이 눌리면, 집에 어떤 긴급한 일을 만들어내서 귀가를 앞당길지 머리를 굴리는데 온정신이 집중된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원샷 때리고 “집에 강아지가 아파서요”라고 대충 둘러대며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정말이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착한사람증후군이라도 있는 건지, 사람을 앞에 두고 빤히 보이는 거절의 행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맹추였다. 뿐만 아니라 밀크티남 사건(“헤어질 거면 오천 원” -지난 글)이후로는 더욱 남자가 사는 커피나 밥만 먹고 곧장 집에 가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빤히 보이는 거절도 하지 않고 먹튀로도 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저희 그럼 2차 갈까요?"라는 말에 수없이 OK를 외쳤다.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거나 나름대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렇게 Stop 버튼을 꾹 누르고도 맥주에 소주까지 함께 마셨던 남자가 있었다. 그도 역시 틴더로 만났던 남자였다. 나보다 6살이 많았고, 카톡에서 ‘오빠 믿지?’따위의 글귀가 적힌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만나기 전부터 친한 척을 했다. 말투가 가볍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때 이미 Stop버튼의 절반이 눌렸는지도 모른다.
사진으로는 꽤나 미남이었는데 더 이상 사진을 믿지 않게 된 때였으니 대충 눈코입이 달려있구나 라는 것만 참고했다. (남자들이여, 여자만 사진빨이 있는 게 절대 아니다!)
그는 까만색 제네시스를 타고 왔다. 세단에서 문을 열고 내리는 그의 얼굴에서 약간 성형인의 느낌이 났다. 눈은 한 거 같고, 음.. 코도 했을 거 같고.. 잠깐, 입술에 필러 맞은 거 아닌가? 나는 그와 훠궈를 먹으며 그의 얼굴을 도둑질하듯 살펴봤다. 물론 성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쯤 되면 그의 가치관에 대해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본인에게 잘 어울리게도 주얼리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오? 어느 브랜드인데요?’라고 묻는 나에게 그는 ‘오늘 우리 제품은 하나도 안 한 것 같은데?’라고 답했다. 그의 회사는 백조모양의 펜던트에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혀있는 목걸이가 유명한 회사였다. 그날 내 목걸이도, 팔찌도 그 브랜드 꺼였는데..
훠궈를 먹고 우리는 2차로 선술집에 갔다. Stop이고 뭐고 그냥 술이나 마셔야겠다 생각할 때, 그는 자신 있게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2차까지 와서 길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게 그린라이트가 아니겠니?"
그는 취기에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했다. 왜 혼자 그렇게 취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내 차례의 계산을 하고 그와 나는 선술집에서 나와 훠궈 가게 앞에 세워놓은 그의 제네시스로 갔다. 그가 대리를 불러서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기에 술도 먹고 피곤하기도 해서 그러라고 했던 것이다.
뒷자리에 함께 앉아서 나는 그가 대리기사를 부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대리기사를 부를 생각은 하지 않고 필러를 맞아 두툼해진 입술을 자꾸 나한테 들이밀었다.
그 순간 나는 납치라도 당한 사람처럼 차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직선방향으로 택시가 줄지어선 대로변이 있었다. 추노꾼에게 쫓기듯이 택시에 올라탔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잠시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적당히 마무리를 짓고 집에 왔으면 불쾌한 일은 없었을 텐데.
구애나 고백뿐만 아니라 거절에도 에너지가 든다. 그게 나는 힘이 들어서 자꾸만 뒤로 미뤘는데, 그러다 보니 어쩔 땐 잘못된 신호가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내 거절에 상처받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도 나는 오해를 키웠다. (나의 거절이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가 된다는 생각도 자의식과잉이 아닌가??)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데 그 정도의 마음 불편함도 감수하지 않으려하면 때로는 예의 없다고 욕을 먹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정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