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할 때는 낳느라 고생했다고, 돌끝맘(돌잔치를 끝낸 엄마)이 되었을 때는 1년간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복직했을 때는 워킹맘이라 고생한다고 말들 한다.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도.
물론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도 있다. 노 키즈존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교통, 식당, 길거리 등 어디서든 불편한 시선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억울할 정도로 불쾌한 시선을 받은 적은 없다. 보통 내가 아이를 안고 있거나 손을 잡고 있을 때 주변 사람의 1/3 정도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인다. 아이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으시기도 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 아이에게 인사를 하기도,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신다. 마트에서. 백화점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심지어 싸움이 일어나 정차하고 있는 버스 안에서도 자고 있는 로디가 깰까봐 주위 할머니들이 조심하신다. 싸우는 어른들에게 눈총을 보내시며.
로디가 34개월이라 제법 컸으니 이제 관심을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아직 사랑받는 것을 보면 의외다. 아이의 미숙함으로 발생하는 귀여움이 사라질 때가 되면, 말이 퉁명해지면, 사리분별에 능통해지면 사랑스럽게 봐주던 시선은 다 거둬질 테고 그 때가 과연 머지않았다 생각하지만 어쨌든 지금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하다.
그런데 나는 원래 낯선 이가 말을 걸거나 쳐다보는 것에 무조건반사 반응으로 경계심을 세우는 편이다. 의지가 아니라 본능이라 막을 길이 없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누군가 날 쳐다보는 듯하고 그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두렵다. 그래서 챙이 넓은 캡을 써 내 시야에서 신경 쓰이는 이들을 차단한다. 자기 눈만 가리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아기처럼.
그런 내가 아이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무장 해제된다. 단순히 ‘나한테 관심 주는 거 아니니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로디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아이임을 ‘실제적으로’ 알고, 또 납득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로디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그 어떤 속임수도, 의도도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를 바라볼 때 내가 가지는 감정은 부끄러움인데 로디와 함께 있을 때는 으쓱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는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로디는 로디의 삶이 있고, 나는 내 삶이 있다. 로디가 외부에서 받는 관심 때문에 엄마인 내 자존감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면 로디가 성장하며 마주하는 갈림길 앞에 내 생각을 주입할지도 모른다. 내가 으쓱해지는 방향으로 아이를 조종해서는 안 된다. 엄마 자존감을 높이는 아이. 너무 고맙고 행복하지만 이제 내 가치를 로디에게 기대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다.
단 로디가 나에게 준 한 가지 마음, ‘새로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그 마음만큼은 간직하며 살고 싶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만나는 수많은 새로운 일을 부족하게나마 어찌어찌 해내고 있는 나를 스스로 격려하는 것. 그 정도는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 로디의 새로운 모험에도 ‘기준’과 ‘한계’보다 ‘응원’을 건넬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