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저씨들이 평생 군대 이야기로 국가를 지켜 낸 자신의 청년시절을 때 빼고 광낸다면 우리 아주머니들은 출산썰로 국력에 힘을 보탠 위대함을 표상한다.
나 또한 그런 아주머니들과 다르지 않다. ‘불타는 수박을 낳는 기분이더라’, ‘소리 한 번 안 내고, 힘 한 번 딱 줘서 애를 낳았다’와 같은 직설적인 후기는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33시간을 분만실에 있었다’는 말을 수줍게 내뱉는다. 수줍은 이유는 ‘33시간’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보통 대단하다는 시선을 받기 때문이다. 수줍은 태도는 그런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빌드업과정으로, 나의 인내심과 강단을 내비치는 장치인 셈이다. 지금 보니 참 약았다.
실상은 이슬이 비쳐 하루 이상 분만실에 갇혀 있었으나 정작 힘든 통증은 2시간 정도였다. 무통주사도 잘 받은 셈이고 정말 딱 세 번 힘 주니 아이가 나왔다. 그러니 사실 나의 분만 과정은 그리 고되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난 그 위대한 출산을 해낸 아줌마라는 것이다. 로디는 내 뱃속에서 10개월을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분만 직전까지 몸무게가 12kg도 채 안 늘었는데 아이 머리가 커서 자연분만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에 임신 전에도 안 먹던 다이어트 식단을 고수했고, 출산휴가가 시작되자마자 하루 만 보를 매일같이 채웠다. 그랬기에 정말 자연분만에 성공했고, 생각보다 금방 이전 몸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수박 한 번 마음 놓고 못 먹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출산할 당시 아이를 받아주시던 담당 선생님께서 내가 마지막 힘을 준 직후 하시는 말씀이 “와,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였다. 남편은 “아, 안 되는데!”라고 외쳤고 주변 간호사 선생님들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 장소에서 내가 가장 나중에 로디를 본 사람이었을 테다.
그랬다.
로디는 자기 아빠랑 똑같이 생겼었다.
방금 배에서 나와 얼굴이 쭈그러진 상태인데 어쩜 아빠 얼굴을 갖추고 나온 것인지 다소 충격스럽기까지 했다. (아빠 디스 아님)
쭈그러진 피부는 점점 세상 공기와 산소를 마시면서 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내 얼굴은 영 보이지 않았다.
로디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이 나를 처음 보신 다음 날, 친정 엄마께 말했단다. “로디가 아빠를 많이 닮았네예~”라고. 원장선생님은 로디 아빠를 보신 적이 없다.
내 친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 시절에 태어난 로디이기에 돌쯤 되어서야 친구들이 로디를 볼 수 있었는데 모두가 확신에 차 이야기했다.
“와, 로디는 아빠가 낳았나봐.”
아빠 거푸집, 아빠 붕어빵, 아빠 미니미 등 2세를 의미하는 다양한 표현들을 배웠다.
그러나 내 친족은 달랐다. 로디 하관이 로디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했고, 어떻게 보면 로디 외삼촌이 보인다고도 했다. 그런데 내 친척은 왜 내 아들 로디가 내가 아닌 내 아빠를, 내 오빠를 닮았다고 한 걸까. 로디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서? 나의 친정엄마는 로디 얼굴에서 나를 찾다 찾다 안 되었는지 긴 혀가 나를 닮았다고 했다.
이쯤되면 소설 하나가 생각난다. 김동인 작가의 '발가락이 닮았다’ 속 주인공은 그의 아내가 부정으로 낳은 자식을 보면서 애써 자식에게서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아보는데 그렇게 찾은 구석이 애처로울 정도로 보잘 것 없다. 자식이 자신의 증조부를 닮았다거나 자신의 발가락을 닮았다거나 하는, 다른 이들은 동의할 수 없는 관계성을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서 이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릴 이가 나뿐만 아닐 테다.
그래도 두 돌이 지나니 제법 많은 친구들에게서 ‘이제 네 얼굴도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는 희망적인, 하지만 확신은 떨어지는 발언들이 간간이 나왔다. 아무렴 어떠랴. 내가 봐도 이전보다는 로디 눈 생김새가 아빠에서 엄마 쪽으로 조금 옮겨지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상담 때문에 어린이집에 방문했을 때 나를 처음 보신 연장반 선생님께서 담임 선생님께 그러셨단다.
“저 분이 로디 어머니라고요?”
역시.
나는 내 친구들의 발언 '이제 네 얼굴도 조금씩 보인다'는 말에서 희망보다는 부족한 확신에 방점을 찍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