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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걸 축하해야 하나

by 새벽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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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별이 나왔을 때 친정 부모님의 반응이 내게 오래 잊히지 않았다. 축복 받아야 하는 새 생명의 성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결국 당신 딸을 위한 마음이었겠지만 그 딸은 자신의 아이가 아들인 것이 부모에게 아쉬움으로 다가간 것에 마음이 사나워졌다.


그러고 4년이 지났다. 생각보다 늦었지만 그래도 귀한 생명이 또 찾아왔다. 올해 실패하면 내년엔 남편을 설득해서라도 시험관을 할 생각이었다. 사실 아들 로디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이따금 한 명 육아도 쉽지 않다 느꼈기에 노력해도 생기지 않으면 그땐 아쉬워하기보다 이대로도 행복하다 여기기로 했다. 그럼에도 너무 늦지 않게 찾아와 준 열매(태명)에게 고마웠고 아직 낳지 않았지만 큰 숙제를 하나 해결한 듯 시원했다.


둘째를 갖고 싶었던 이유는 집안, 특히 부모에게 일이 생겼을 때 로디 혼자 고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로디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크게 바란다기보다 그래도 부모가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남남으로 여기지 않는 자녀였으면, 우리의 관계가 그 정도는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로디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부모 다음으로 선명하게 기억해 줄 평생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물론 나이 차가 있기에 로디가 친구를 쫓아다닐 때 열매는 아직 아가일 테고 생각보다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가족으로 함께 있을 때만큼은 깊고 잔잔한 따뜻함이 차곡차곡 쌓이길,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나지는 않아도 가족이 아니라면 절대 공유할 수 없는 온기가 둘에게 함께 기억되길 바랐다. 그래서 부모가 떠난 후에도 서로의 어린 날을 추억하는 날이 오길 기대했다. (그런 맥락으로 아이가 어릴 때 여행을 다니는 부부들에게 ‘본인들 욕심 채우려 애 고생시키고 남 불편하게 한다’고 욕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단호히 무시하고 싶다.)


주변에선 내가 임신한 것을 알고 첫째 로디가 아들이니 둘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덕담이라 생각하며) 건넨다. 그 관심을 오해 않고 감사히 받았다. 다만 다른 이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나는 둘째도 아들이길 바랐다. 이유는 로디 때와 같다. 나는 한 번도 우리 가정에 딸이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처음엔 뚜렷한 이유 없이 막연하게 딸이 두려웠다. 그래서 왜 이토록 딸이 두려운지 이해하고 싶어 딸과 엄마의 관계를 다룬 글들을 찾아봤다. 그렇게 알아낸 첫 번째 이유는 내 마음에는 ‘딸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식을 바라보는 건강한 태도는 자녀를 나와 다른 한 생명으로 여기는 시선이며 한 발 떨어져서 그의 성장과 독립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자세다. 그런데 많은 엄마들이 동성 자녀인 딸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한다고 한다. 그 많은 엄마들 중 단연 탑을 찍을 사람이 바로 나다. 딸이 자라는 내내 자신의 그 시절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며, 채찍질하고 싶어할 테다. 어릴 적 주저하고, 무너지고, 실패했던 나를 딸에게 빗대며. 과한 불안과 책임감은 간섭으로 표출될 것이 뻔하다.


두 번째 이유는 딸이 나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란 믿음같은 확신이 있었다. 지금 우리 부모님은 그들의 인생 절반 이상을 자식을 위해 몸과 마음이 마를 때까지 소비해왔다.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나는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 희생의 산물을 순전한 감사로 받지 않는다. 상처로 오염된 감사를 안고 죄책감과 원망을 동시에 느끼며 누구에게도 연습해보지 못한 감정을 처리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물며 우리 부모님처럼 그들이 가진 모든 물질적, 심적 자원을 자녀에게 쏟아 낼 자신이 없는 나는 대체 얼마나 큰 상처를 딸에게 안겨줄 것인가.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미 정해진 성별이겠지만, 딸이라도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지만 가능하다면 아들이었으면 한다고. 만약 딸이라면 평생 걸릴지도 모를 마음 속 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달라고.


15주 6일. 담당 선생님이 안 계셨기에 초음파는 다음에 보고 입덧약만 받을 참으로 병원에 갔다. 그런데 다른 과 선생님이 주수상 초음파를 볼 때가 되었으니 보자 하신다. 내일이면 16주이니 지금 초음파를 보면 열매 성별을 통보 받으리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잠시 주저했으나 미룬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 의사 말을 순순히 따랐다.


초음파 겔이 발렸고 화면이 비쳤다. 가랑이부터 보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뭐가 보이나요, 지금?”

“아뇨…”

“없는 것 같죠?”

“혹시 딸인가요…?”

“왜요, 아들이어야 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어요. 딸 원하셨거든요.”


의사가 탐촉자를 뗐다가 다시 배에 올려두는데 “어, 잠깐.”하며 멈췄다.


“뭐가 보이는 것 같은데. 잠시만요.”


겔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감촉에 민감해졌다.

잠시 기계음이 들리더니 “보이는 것 같죠?”라며 나를 화면에 집중시켰다.


대답 없는 내게 “부모님께 사진 보내드리세요. 더 희망 갖지 않으시게. 허허.”


둘째를 확인하자마자 상상했던 장면이다. ‘아들이면 어쩌지’. 마음으로 내내 아들을 생각했으면서도 떠오른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둘째마저 아들이면 어쩌나였다. 부모님 마음이 아닌, 부모님 반응에 무감할 수 없는 내 마음이 걱정되어서.


지체할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걱정의 싹을 뽑아내려 부모님이 있는 대화창을 열어 성별을 또렷이 알 수 있는 초음파 사진과 함께 애써 발랄함을 묻힌 '아들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곧바로 따라온 답장에 속이 문드러졌다. 목구멍이 조이면서 젖어드는 느낌. 그러지 않으려 수 개월을 그려냈던 장면이지만 현실은 보다 더 아팠다.


축하해야 하나


담백했다. 실제 내뱉는 억양과 지었던 표정이 더해졌다면 이보다 쓰리진 않았을까.


귀한 생명인데 축하하고 말고가 어딨냐고 받아치는 내 메시지에 곧이어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아빠는 너한테 딸이 있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며,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뒤통수 뒤로 날아오는 희미한 한 마디가 나를 명중시켰다.


의사가 맞다면 맞는 거다


이번엔 말투가 동봉된 메시지였다. 어떤 의미와 마음으로 던져진 말인진 중요하지 않다. 또 이렇게 미세한 스크래치가 그였다. 멀리서 보면 티도 안 나는, 조금 더 새 것이라는 질감 외엔 크게 다르지 않은 그것이 바랜 흔적들 사이에 묻혔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아픈지.


이게 어딜 봐서 상처 입을 말이냐고, 과잉 반응하지 말라고,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라고, 또 동굴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냐고, 말 하나하나에 멋대로 의미를 담아 상처를 만드는 너한테 딸이 안 찾아오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로디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외할아버지임을 잊지 말라고, 첫째가 아들이었을 때도 아쉬워했지만 그만큼 딸의 아들을 물고 빨고 업어 키워 주신 분이라고, 둘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집에 오는 길에 그렇게 되뇌이며 가슴을 쾅 쾅 내리쳤다. 내 주먹에 아픈 것이라 믿어질 때까지 쳐댔다.


그날 밤, 울음 소리에 꿈에서 깼다. 아니 꿈이었는지, 꿈같은 망상이었는지. 그렇게 두 번을 울며 남편과 로디를 깨운 밤이다.


충분히 여과되지 못한 이 글이 부디 닿지 않길.

써내려간 시간이 결국 내게 득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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