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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저는 노래방이 정말 싫어요

by 새벽숨


음주가무를 정말 좋아하지도, 즐기지도 않는 나란 사람에겐 보수적인 직장은 맞지 않다. 조용히, 묵묵히 일하는 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지만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행히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딱히 보수적인 집단은 아니다. 물론 이전에도 억압적이진 않았지만 5~6년 전까지만 해도 저 위에 계셨던 한 분의 기분을 많이 맞춰야 했다. 아침에 커피 타 드리는 것을 좋아했던, 기념일에 빼빼로나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을 은근히 바랐던. 곰인 나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나마 막내였던지라 조용히 묻어갔다.


그는 술을 마시는 사람과 아닌 사람 자리를 나눔으로써 은근한 차별을 두었다. 술자리에서의 따돌림. 유쾌하진 않지만 사이다만 홀짝이는 위치가 나쁘지는 않았다. 딱히 친했던 사람도 없었고 그나마 말을 섞던 사람들은 나와 함께 사이다로 건배했던 이들이니까. 그래도 소규모 회식에서는 그런 식으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식 3차를 노래방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보다는 나았다.


회식 때 딱 한 번 노래방에 가봤다. 역시나 윗분 때문에. 그 분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해 여러 분들의 눈총을 받으며 ‘사랑의 밧데리’를 불렀더랬다. 아는 트로트가 그 하나였다. 막대기같이 서서 그 3분 남짓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곤란함은 DNA에 각인되어 노래방 이야기만 나와도 알레르기가 오는 듯 코털이 간질간질하다.


회사를 10년 정도 다니다보니 나보다 오래 다닌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제법 편해졌다. 술자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하셨던 분도, 내가 낸데 하는 사람들도 사라졌고 내가 어려워해야 할 분들도 쉽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이며 각자 가정사도 웬만한 사람들보단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믿었다. 나를 충분히 잘 아는 분들이시니 나를 노래방에 데려 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분이 여느 때와 다르게 식사 시작부터 노래방에 가자고 노래를 부르셨다. 아, 제발. 그 자리에서 노래방에 가고 싶은 사람 단 한 분이셨는데 하필 그 한 분이 여기서 제일 목소리가 큰 분이었다. 음주가무를 피하지 않으신다. 노래를 좋아하신다. 알고 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노래방에 끌고 가신 적은 없었는데!


말 그대로 나는 질질 끌려갔다. 온 근육을 써가며 싫은 티를 내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새벽아. 찬송가라도 불러. 들어줄게.


오? 그래?


사실 이전의 상사에게는 감히 수긍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다. 그런데 이 상사님이라면. 지금 함께 끌려가고 있는 이 구성원이라면. 그래. 좀 창피할 뿐 곤혹스럽지는 않을 테다. 형형색색의 미러볼 조명을 받으면서 찬송가 한 곡 정도는 뽑아볼 수 있지 않을까.


속으로 무산되길 바랐던 3차 노래방이 결국 실현됐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새벽이, 마이크 잡아라.

찬송가 부르라고 하셨어요, 분명.

...

제목 '사랑합니다'

가수 '이재훈'


(수군수군) 대박. CCM이가? 뭔데. 진짜?



(축복하듯 한 손을 군중들에게 내밀며)
난 행복합니다. 내 소중한 사랑.
그대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답죠.



1절 시원하게 부르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말도, 박수도, 웃음도 없네. 노래방에서의 5초간 정적은 가히 여느 싸함에 견주어도 손색없다. 이제 노래방에서 찬송가라도 불러 보라고 하던 말들이 쏙 들어가겠지.


하지만 어쩌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용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다들 끌려온 듯했는데 의외로 각자의 18번이 있는지 척척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15분 정도 남았을 때 상사님이 한 마디 하셨다.


“자, 마지막으로 각자 한 곡씩 부르고 점수 제일 낮은 사람이 커피 쏘기!”


또...?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얼굴이 환해졌다. 핸드폰 조명으로. 다들 폼이 똑같은 걸 보니 스트리밍 어플을 켜고 검색 중인 듯했다.


결론은,


난 생각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를 아주 동요스럽게, 정직하게 불렀는데. 처음 알았다. 내가 이 정도의 싸함은 제법 견딜 수 있는 배짱을 길렀단 사실을. 뭐, 커피도 잘 얻어먹었다. 10년 짬바가 대체 어디 갔나 했더니, 이 정도면 나 많이 컸다.


꾸역꾸역 싫은 걸 해내 온 10년 치의 사건들이 하나씩 지나간다. 시간은 흘렀고 내가 어떻게든 그 모든 걸 견뎌냈다. 그 견딤.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인 자산이다. 누가 대신할 수 없기에 귀중하다. 물론 시험의 컨베이어 벨트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될 리 없으니까.


정말 가기 싫었던 노래방에 끌려간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난이 오나 싶었던 끔찍한 경험들을 차근차근 지나왔다. 어쨌든 시간이 날 떠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밀림에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니까.


같은 경험을 또 하고 싶진 않지만 덕분에 퇴사 전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남겼다. 솔직히 이제 이런 특별한 에피소드는 안 남겨도 괜찮다. 10년간 아쉽지 않게 충분히 만들었다. 조용히, 편안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 표지 사진 출처 |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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