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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Apr 11. 2024

어느 날부터 아이가 옷방에 숨는다


로디는 부쩍 나를 이동시킨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같이 길을 걷다가도 나를 먼저 가게 하거나 방에서는 나를 내보내고 문을 닫으려 한다. 흥미로움을 잔뜩 담은 저 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 집은 침실에 세면대가 있다. 로디가 외출하고 오면 옷방 안에 있는 발받침대를 가지고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손을 씻기 위해 로디에게 옷방에서 발받침대를 가지고 나오게 했다. 그런데 로디가 옷방에 들어가더니,


엄마


응?


(양 손바닥을 내게 내밀며) 저리 가시요


왜애, 뭐하려고오


(손바닥을 더 강하게 내밀며) 가시요오


로디는 나를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옷방 안에는 위험한 물건이 있지는 않지만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괜히 불안했다. 노크를 하며 손부터 씻자고도 해봤지만 로디는 나가라는 말만 해댔다. 그래서 가만히 옷방 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그런데 혼자서 연극을 하는지 노래를 부르는지 아무튼 즐거워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참고로 혼자 집중해서 노는 아이는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데 현실 세계의 엄마가 갑자기 등장하면 아이는 놀랄 뿐 아니라 강한 불쾌감을 갖는 듯 원망을 쏟아낸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엄마가 무너뜨렸다는 듯이.


그래서 더 치밀해야 한다. 어떤 소리도, 동작도 들키지 않도록.


아이가 보이는 최소한의 틈만 허락하며 문을 빼꼼히 열었다.


양문 사이로 보이는 로디는 이 옷에서 저 옷으로 옮겨다니며 어린이집에서 들었을 만한 단어들을 쏟아냈는데, 그 안에는 같은 반 친구 이름이 간간이 들어가 있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하는 듯한 문장이 섞여있었다.


네, 네! 선생님!


아,무나 나,와라


원생이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아주 바빠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문을 닫으려는데, 아뿔싸. 눈을 마주쳐 버렸다.


안 돼애!


나도 놀래서 "미안, 미안!"하며 문을 쿵 닫아버렸다.


뒤이은 정적에 심장이 콩닥거렸고 로디의 놀이를 망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렇게 10초 정도 지났나. 다행히 로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친구 '빙봉'이 나온다. 주인공이 자라면서 빙봉이 사라지는 장면은 MBTI가 F인 분들은 분명 울었을 것이다. (나는 T다.)


그 영화를 본 후 나는 종종 로디에게도 빙봉과 같은 친구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은 혼자 놀기보다 엄마, 아빠를 더 많이 찾지만 가끔은 숨어서 저렇게 열심히 여러 동화가 섞인 이야기를 구연하는 걸 보니 이미 로디 옆에는 그런 친구가 있는걸까.


로디가 자신의 빙봉을 나에게 소개해주는 순간이 오면 제 아무리 T라 할지라도 눈물을 안 흘리고 배길까.


아니, 로디 마음 속에만 있는 그 친구는 세상 어디에도 나오지 못한 채 밀봉될지 모른다.


로디가 '봉인 해제'를 외치지 않는 이상 그 친구는 영원히 로디만의 친구로 남아 있을테다.


그래도 괜찮겠다.


그러면서 생각해본다.


내게도 분명 있었을 빙봉 혹은 데미안을 지금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 친구들은 나를 계속해서 봐왔을까?


엄마가 대견해할까?


그렇다면 그간 자신들을 잊고 지낸 날 원망하진 않을까.


기억에서 흐려진 친구들을 더듬어 본다.


그들과 나눈 대화, 함께 본 장면들.


로디에게도 그런 따뜻한 날들이 쌓여갔으면.




사랑하는 로디.


엄마도 여섯 살? 일곱 살쯤 아지트가 있었어.

아직도 외가댁에 있는 쇼파인데. 로디도 기억하지?  


나무로 만들어진,

딱 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쓸 법한 나무 쇼파.

몸을 숙여 쇼파 옆을 보면 아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거든.

지금 보면 그 좁은 곳에 어떻게 들어갈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구멍이 작아.


그럼에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서 겨우 들어가면

힘들게 들어간 보람이 있어.


어찌나 아늑하고 따뜻한지.


할머니는 그런 엄마 때문에 힘들어도 쇼파 밑을 쓸고 닦고 하셨을거야.


아니면 엄마가 기어다니면서 먼지를 다 쓸었으려나.


아무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곳에서 엄마는 많은 상상을 했어.


그러다 나무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면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비록 낮아서 앉을 수도 없고 밝기보다는 어두웠던 공간이지만 그래서 더욱 엄마의 다락방으로 안성맞춤이었단다.


로디에겐 아빠, 엄마 옷방이 너만의 다락방인가봐.


부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


길이가 다른 옷 뒤로 요리조리 숨으면서,

블라인드 틈으로 이따금씩 들어오는 빛을 즐기면서

구연동화를 하고 뮤지컬을 공연하는 곳.


그곳에서 너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봐.


다만 좁은 곳이니 거실에서처럼 춤을 추면 다칠 수도 있어.

그것만 조심해줘.


그리고,


로디 마음 속에만 살 수 있는 친구가 생긴다면

소중히, 오래도록 기억해줘.


엄마도 너무 궁금한데 비밀로 해도 돼.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그 친구에게 속삭여 줘.

그 친구는 평생 친구가 될 거야.


(엄마 얘긴 너무 많이 하지 마... 할 거면 좋은 이야기 위주로 해주면 안 될까? ㅎㅎ...)



엄마는 널 도촬하는 것이 너무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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