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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민혜 Jun 04. 2021

미꾸라지가 죽었다

집에서 키우던 미꾸라지가 죽었다.


관상어도 아닌 음식의 재료로 쓰이는 미꾸라지를 키운다는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내 의지로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미꾸라지는 1년 전쯤 아이들이 하고 있던 방문 미술 수업에서 사용한 수업자료였다. 매 주 자연 재료를 가지고 만져보기도 하고, 관찰하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달팽이를 가져오시기도 했고, 어떤 날은 장수풍뎅이, 작은 돌 게가 오기도 했다. 그 날은 '미꾸라지'가 수업 주제였다. 이 날 나는 볼 일이 있어서 외출을 했고, 집에 돌아오니 식탁 위에 미꾸라지 두 마리가 플라스틱 컵 안에 한 마리씩 들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기념으로 선생님께서 미꾸라지 한 마리 씩을 주고 가셨다는 거다. 내가 집에 있었다면 괜찮다며 고사했을 텐데, 아이들 할머니는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그대로 받아두신 모양이었다. 난감했다. 살아있는 생명인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릴 수도 없고, 나는 그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 한 채 일주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좁은 플라스틱 컵 안에서 녀석들은 용케도 살아내었다. 혹시나 죽었나 싶어 들여다 보면 여전히 꼬물거리고 있었고, 그렇게 일주일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도 더 이상 그대로 둘 수만은 없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집에서 키우기로 한 것이다. 


먼저 어항을 샀다. 어항 바닥에 깔 조약돌과 물고기 먹이도 샀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미꾸라지 키우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 돌보기만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는 나로서는 다른 생명을 돌본다는 것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몇 가지의 화분과 식물들도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물을 주는 정도가 전부인데 미꾸라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먹이를 주는 것으로만 최소한의 돌보기를 시작했다. 어항 물 갈아주는 일은 자연스레 남편의 몫이 되어버렸다. 미꾸라지는 예쁘지도 않고, 작은 어항에 키우기엔 크기도 크다. 좁은 플라스틱 컵 안에서 일주일을 굻은 채 갇혀 있던 미꾸라지는 어항으로 옮겨져 먹이도 먹고, 두 마리가 서로 장난도 치면서 처음에는 매우 좋아보였다. 그렇게 잘 지내나 싶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둘 중 한 마리가 먼저 죽었다. 아침 까지만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저녁에 보니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은 나머지 한 마리가 1년을 넘게 우리와 지냈다. 


미꾸라지는 흙이 필요하다고 했다. 흙을 파고들어 그 밑에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준비한 동그란 어항과 조약돌은 미꾸라지가 살기에 그리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흙을 퍼와서 어항에 깔아줄 수도 없었다. 역시나 미꾸라지는 애완용으로 키우기엔 여러모로 서로가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미꾸라지에 꽤나 정을 주었다. 매 번 어항과 돌들을 씻고 물을 갈아주는 것이 상당히 귀찮은 일일텐데도 어쨋든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상 최선을 다 했다. 


작은 관상용 물고기처럼 어항 안을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먹이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미꾸라지는 항상 어항 바닥에 가만히 내려 않아 이따금씩 입만 뻐끔댔다. 함게 하던 친구도 이제 더 이상 없다. 혹시 죽은건가 싶어서 어항을 손가락으로 톡톡 쳐보면 깜짝 놀라며 몸을 뒤는 것으로 생사를 확인했다. '아직 살아 있구나', 싶다가도 이 녀석은 저 속에서 '죽지 못 해 사는걸까', 아니면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걸까'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매일 똑같은 일상. 한 번씩 물을 갈아주고, 아침 저녁으로 먹이를 주면서 우리는 미꾸라지를 지켜주고 있었던 걸까, 아님 괴롭히고 있었던 걸까. 내가 보기에 미꾸라지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친정 엄마는 미꾸라지를 근처에 있는 공원 연못에 놓아주자고 했고, 친정 아빠는 아빠가 키우시는 어항으로 가져가 거기에 두자고 하셨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미꾸라지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아이들과 남편은 싫다고 했다. 정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잘 살고 있는데 왜."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잘 살고 있는 걸로 보여? 죽지 못해 사는건 아닐까." 정작 아무 말도 없는 미꾸라지를 앞에 두고 우리는 그런 대화를 했다.  


그러던 미꾸라지가 어제 갑자기 죽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미꾸라지의 형태가 이상했다. 늘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었는데 꼬리는 바닥에, 머리는 위를 향해 기이한 모습으로 떠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멀찌감치 그런 형태만 보고는 친정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달려와 보시고는 '이미 부패가 된 것 같다'고 하셨다. 너무나 끔찍했다. 미꾸라지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아이들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다지 슬퍼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나 가장 동요한 것은 남편이었다. 며칠 전부터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고, 더 잘 살펴주지 못 해서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죽은 미꾸라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나,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나 미꾸라지의 죽음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너무나 잔인한 것 같아 스스로가 싫어졌다. 하루 종일 많은 비가 내렸고, 미꾸라지는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어항 속에서 부패된 채 그대로 계속 떠 있었다. 나는 어항 근처에 가 볼 엄두도 내지 못 한채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귀가한 남편이 드디어 죽은 미꾸라지를 마주했다. 남편은 어항을 톡톡 두드려주며 '미안하네'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돼?"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진짜?"

"그럼, 뭐 어떻게 하려고?"


나는 '음식물 쓰레기 아니야?'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묻어줘야 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쓰레기통에 버리자."


혹시 남편 입에서 묻어주자는 말이 나올까봐 나는 그냥 일반쓰레기로 버리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새벽에 작은 아이가 자다 깨서 울었다. 아빠를 찾던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서 울며 말했다. 


"아빠 미꾸라지 버렸어?"


아이는 울었다. 괜찮은 척 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더니 나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감정을 어지간해서는 잘 표현하지 않는 아이다. 그러다가 깨어나서는 아빠 품에 안겨 죽은 미꾸라지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나라고 마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1년이 넘게 함께 지내오면서 나름의 '정'이란 것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한 편으로는 홀가분한 것은 어항 속의 미꾸라지가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건 때론 죽음보다 더 한 고통임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동안 미꾸라지는 행복했을까. 미꾸라지의 생각을 알 수 없어서 나는 녀석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안도해야 할지 내 감정을 결정하지 못했다. 

'정'이라는 것이 무섭다. '생명'이라는 것도 그렇다. 아이들과 함께 미꾸라지에게 먹이를 주던 기억, 남편이 물을 갈아줄 때마다 아이들이 옆에서 신기하게 지켜보던 모습들, 이제 우리에겐 그런 추억만이 남았다. 


너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이 나름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슬펐어. 고마워.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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