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네브링겐은 로포텐을 다시 가야 하는 명분이 되었다
무거운 배낭을 숙소에 내려놓고 나오니 몸도, 마음도 홀가분했다. 한결 편안한 상태가 되니 레이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도시들처럼 로포텐에도 여행자들 사이에 명소로 꼽히는 곳이 있는데, 레이네브링겐이라는 산이다. 그 산의 꼭대기에 서면 로포텐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피오르와 작은 섬들이 흩뿌려져있는 마을 풍경이 아름다워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내가 로포텐에 마음을 홀딱 뺏겨 오게 된 것도 그 풍경 사진 하나 때문이었다. 평평한 모니터 화면의 사진에 불과하지만, 내가 직접 그 곳에 서 있고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레이네브링겐은 올라가겠노라며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정작 로포텐에 오고 나서 그 마음을 접고 말았다. 다름아닌 등산로가 험하다는 평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정도로 험하길래 찾아봤더니, 암벽 등반을 하듯 가파른 바위를 타고 사실상 정해지지 않은 등로를 올라야 하는 수준에 미끄럽기도 하단다. 여기서 그치면 그만인데, 그만큼 험해 레이네브링겐을 오르다 세상을 떠난 사람도 몇 있단다. 2015년엔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던 미국 대학생이 가을학기 휴가를 맞아 트레킹 여행을 왔다가 이곳에서 실족해 약 1주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을 본 순간 거짓말같이 레이네브링겐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 환상적인 풍광을 보기 위해선 낮은 확률이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멀쩡하게 잘 올라갔다 오는 사람이 거의 100% 이고 불상사가 발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만약 그 불운한 주인공이 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심지어 그 댓가는 죽음일 수 있어서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못내 아쉽기도 하다. 바람도 잔잔하고 가끔 하늘이 보이는 구름 많은 날이었는데, 위험성을 인지한 이상 조심스레 올라갔을 것이며 전혀 아무 런 문제 없이 정상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며 감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포텐은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널렸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그 풍경을 느끼자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당시 이런 문제 때문에 계단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등산로 초입까지만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정상 부근까지 계단이 완공되어 ‘다치거나 죽을 걱정 없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로포텐 여행 정보 사이트에는 계단이 완공되기 전에는 등산 난이도가 어려움으로 나와 있었는데, 많은 인부들의 노력으로 계단이 놓인 이후에는 쉬움으로 바뀌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큼 여행에서도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대개 그 기준은 비용과 시간이었다. 여행 기간을 주로 단기간으로 잡다 보니, 가고 싶어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할 때 특히 그랬다. 여행 기간은 고작 3일이지만 호수가 아름다운 블레드, 세계자연유산의 위엄을 보여주는 포스토이나 동굴과 슈코치안 동굴,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국내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했던 아담한 해안 마을 피란.. 이곳들을 모두 대중교통으로 다녀온다는 건 분명 무리가 있었다. 결국, 네 곳 중에서 조금 더 마음이 갔던 슈코치안 동굴과 피란 마을을 다녀왔다. 경비의 압박이 컸던 곳은 스위스였다. 여행자패스인 스위스패스를 이용했지만 추가 요금을 내야 갈 수 있는 곳들이 있었고, 결국 스위스에서 명소 중의 명소로 손꼽히는 마테호른과 융프라우요흐를 포기하며 가능한 무료로 방문할 수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로포텐의 레이네브링겐은 장소의 위험성이 기준이 되었다. 여행이 끝난 후에 돌이켜볼때 나름대로 세워놓은 기준에 부딪혀 그곳에 발을 딛지 못했다는 게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쁜 방향의 아쉬움이 아닌, 좋은 방향의 아쉬움이었기에 여운이 길게 남으면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레이네브링겐을 포기한 게 오히려 이다음에 로포텐을 꼭 다시 찾아야 하는 명분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