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베르 해변과 누번 산에서 로포텐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로포텐에서 맞는 세 번째 아침은 상쾌했다. 단 이틀을 텐트에서 잔 후 침대가 있는 아늑한 숙소로 넘어온 것뿐인데, 안락함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몸을 일으키기가 싫을 정도였다. 전날 밤부터 몸과 침대가 하나가 된 것처럼 누워 있다 보니 피로가 많이 풀렸다. 창 너머로 보이는 레이네의 풍경은 7만 원이라는 비싼 숙박비가 아깝지 않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레이네의 풍경을 안락한 방에서 보니 그 맛이 한층 더 사는 듯했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퇴실하러 내려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잠깐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아 방 열쇠는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 놓았다. 그리고 포스트 잇을 집어들어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안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화창했다. 쌀쌀했지만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어 훈기가 돌았고, 공기가 상쾌하니 기분이 좋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여행자들이 제법 있었다. 한국인 중년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들려왔다. 사람들이 어느정도 있으니 혼자서 모험하는 느낌보다는 제법 여행하는 분위기가 났다.
오늘의 목적지는 람베르. 레이네에서 E10도로를 따라 25km를 가면 나오는 레이네만큼 작은 마을이다. 버스는 레이네에서 기다리던 승객을 태우고 동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래도 날씨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시각각 변하고 예측하기 힘든 날씨는 람베르로 가는 짧은 30분 동안에도 이름값을 했다. 파란 하늘 아래에 슬며시 드리운 먹구름은 비를 뿌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람베르에 내렸을 땐 솜뭉치같이 흰 구름이 예쁜 장식처럼 박힌 푸른 하늘이 반겨주었다.
도로를 따라 500m쯤 올라가니 캠핑장이 나왔다. 예약은 하지 않았던 터라 현장에서 체크인을 시도했다. 리셉션이라고 쓰인 빨간색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클래식한 실내 분위기가 확 들어왔다. 데스크 앞에서 ‘실례합니다’며 허공에 외치자 옛스러운 안경을 쓰신 주인 아주머니가 어느 방에서 나오셨다. 텐트를 치고 하루를 머물고 싶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해주셨다. 장부에 이름과 인원, 주소와 캠핑 유형 및 떠나는 날짜를 적고 바로 캠핑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캠핑장 안에서 텐트를 칠 수 있는 잔디밭 구역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었다. 번듯한 캠핑장인 만큼 어느 곳에서나 무난하게 칠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주변의 숙소와 차들과 거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치기 전 여지없이 비가 찾아왔으나,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이었다. 날은 곧 갰고 편안하게 텐트를 펼 수 있었다.
캠핑장을 찾은 이유는 역시 편리함 때문이었다. 백패킹 여행 전 조언을 구했던 여행자의 말대로 시설도 충분했다. 화장실은 물론 샤워장과 공용 주방까지. 이 모든 것들은 캠핑장 내 커다란 녹색 건물 안에 있었다. 샤워는 동전함에 10크로네를 넣어야 물이 일정 시간동안 나오는 유료제였지만, 씻을 곳이 마땅하지 않은 백패킹 여행에서 편하게 온수로 여행 기간동안 쌓인 찝찝함을 풀어낼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공용 주방엔 웬만한 조리 도구는 다 갖춰져 있어 보다 편리하고 넉넉하게 음식을 해 먹기에 충분했다.
하루를 보내기 위 모든 작업을 끝내고 나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내리기 전엔 그래도 좀 흐렸는데, 비가 지나간 람베르 하늘은 지저분한 것이 깨끗해진 것처럼 푸르고 쾌청했다. 남은 일정동안 이만한 날씨는 다신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좋은 날씨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푸른 하늘에 캠핑장 뒤편에 있는 람베르 바다도 빛났다. 고운 색깔을 뽐내며 부서지는 바다는 시원한 탄산음료같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모래는 또 어찌나 고운지, 그야말도 해변의 백미였다. 한 입 먹으면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이 아주 희고 고왔다. 맑은 하늘 아래 해변은 여전히 쌀쌀해 몇몇 사람들만 있었으나, 모두 천천히 거닐며 저마다 시간을 보냈다.
미리 사둔 라면을 활용해 간편히 점심을 만들어 먹고, 람베르 해변 뒤에 있는 산인 누번(Nubben)으로 향했다. 정류장에서 도로를 건너 집 몇 채가 있는 골목길을 따라 이동하니 등산로가 나왔다. 산을 슬쩍 올려다 봤을 때, 순간 까마득했다. 부네스 해변 앞의 언덕보다 3배 높은데, 가파른 정도는 더해 보였다. 멀리 흙길을 따라 앞서 올라갔던 등산객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간 굴러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정도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등반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이어지는 급경사 길에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헉헉 찼다. 그래도 길이 험하지는 않아 아래에서 봤을 때 가졌던 위험해 보인다는 생각은 싹 사라졌다. 흙바닥만 보며 올라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중간중간 경치도 보고 쉬어가며 30분 쯤 걸었을까.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랐다. 지상과는 달리 바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강하게 온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 하나는 시린 바람마저 무시하게 만들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정상 뒤편으로 산맥이 뻗은 쪽을 제외하면, 주변 풍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정면에는 물감을 뿌린 것처럼 푸른 바다와 곡선을 그린 람베르 해변이 내려다보였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리니 스위스를 빼다 박은 것처럼 굴곡진 산맥과 바다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그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와 먼발치 또 다른 마을인 프레드방이 보였다. 프레드방 또한 험준한 산맥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다른 쪽에서는 차량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다리가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인 셈이다.
뭉게구름이 곧 손에 잡힐 듯 낮게 뜬 거짓말같은 날씨는 풍경의 색감을 한층 뚜렷하고 밝게 만들어 주었다. 비바람 속에서 밤을 보내며 '참 개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앞선 날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여전히 여정이 일주일 가까이 남아 있지만, 이렇게 완벽한 날씨는 다시 없을 것 같단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바람이 잠잠했던 해안과는 다르게 산 정상엔 내가 올라온 순간부터 내내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얼굴이 뻐근해졌지만, 이 풍경 앞에선 내 안면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꼭 레이네브링겐이 아니어도 좋구나. 로포텐은 내 발걸음이 어딜 향하던지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구나.
람베르에서 로포텐의 매력에 더욱 흠뻑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