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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Feb 07. 2024

9~10일차. 마지막 캠핑과 백야 속 자정 등반

우연히 찾아온 큰 행운 덕분에 늦은 밤에나 있는 버스를 타야 하는 걱정은 기우가 되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그 앞 시간대 버스가 출발하기까지도 시간이 한참 남아 터미널 앞 쇼핑몰에 있는 마트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 먹으며 허기를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기다림 끝에 마지막 목적지인 스볼베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날씨가 몇 번이나 변해도 이상할 게 없는 로포텐이지만, 하늘이 곧 여정을 마칠 내게 마지막 선물이라도 주는 듯 가는 내내 푸르고 청아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나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쾌청한 하늘 아래 빛나는 섬 풍경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가슴 깊이 간직하려고 애를 썼다. 물감으로 뿌려놓은 듯 짙푸른 바다, 미세먼지 한 톨 없는 맑고 은은하게 파란 하늘, 낮지만 거칠게 솟은 바위 산들은 로포텐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이런 풍경을 로포텐이 아니면 전 세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70km를 달려 스볼베르에 도착했다. 스볼베르는 인구가 약 4,700명 정도 되는 도시이다. 앞서 거쳤던 레크네스보다도 약 1천 명 정도가 더 많다. 인구 수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면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로포텐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며 지리상으로 제도의 중앙에 있고, 많은 인구와 위치만큼 로포텐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인 것이다. 작지만 로포텐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공항도 자리한다. 내가 타고 간 버스는 스볼베르의 중심, 버스터미널이 종점이지만, 찾아본 캠핑장이 중심가에 들어가기 전 약간 외곽 지역에 있어 중심지까진 들어가지 않았다. Osan이라는 왠지 한국의 향기도 한 스푼 있는 듯한 외곽 마을의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캠핑장까지 2km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이제는 익숙하게 체크인을 하고, 인근 마트에서 연어를 사다 구워 먹으며 마지막 날을 천천히 여유 있게 보냈다. 레크네스까지 태워다 준 그 운전자가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스볼베르의 캠핑장


로포텐을 떠나기 전 자정 등반을 꼭 하고 싶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이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과장하면 '무박 2일'로 등반을 하는 건데, 그때 등산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또 어떤 풍경이 보일까 궁금해졌다. 오후 11시. 로포텐에서 이 무렵에 야외 활동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왠지 떨리는 마음으로 이름도 어려운 산으로 향했다.


하늘은 한국의 초저녁마냥 환했지만, 자정에 다다른 시간에 마을은 극도로 고요했다. 간간히 울어대는 갈매기와 도로를 달리는 차 몇 대 만이 이따금씩 정적을 깼다. 하늘은 밝아도 사람들의 생체 시계는 깜깜한 밤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등산로 입구는 호젓했다. 바람도 잔잔하고, 다니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하늘이 파란 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약간은 오싹한 마음과 함께 등산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는 자정으로 바꼈고 날짜가 넘어갔다. 자정에 등산을 하고 있다니!


그 생각도 잠시, 가파른 길을 열심히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본 로포텐은 참 아담했다. 마을도, 산도, 길도 다 작고 아기자기하게 보였다. 이 짧은 등산로를 오르는 과정에서도 참으로 거친 모습을 보여준 로포텐인데, 탁 트인 곳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붉게 타오르는 태양빛만이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를 비췄다. 풍경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벌써 여행의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로포텐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에게서는 몸에 자연스럽게 벤 여유가 느껴졌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로포텐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열흘 간 겪은 이곳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에서 보나 희극이다. 내 여행 또한, 갖은 고생은 했지만 즐거운 추억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정을 넘어서 등반을 한 탓인지, 고단한 일정이 다 끝나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캠핑장에 돌아와서는 2시에 잠들어 한참을 뻗어 있었다. 체크아웃 시간은 따로 없다고 하여 느긋하게 일어나니 벌써 정오가 다 되었다. 떠나는 날이라고 하늘이 배려를 해 주는 건지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을 만큼 청정했다. 첫 날엔 나를 시험하듯 비바람이 그렇게 몰아치더니,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스볼베르에서 보되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하는 시간까지는 한참 남은 시점이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변을 걷는 김에 마을 구경이나 더 하다 공항으로 가는 로포텐에서의 마지막 버스를 기다렸다. 10분을 달려 도착한 스볼베르 공항은 지금까지 가본 공항 중에서 압도적으로 작았다. 공항같지 않은 아담한 규모가 신기했다.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공항이었다. 로포텐의 풍광은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날씨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가도 풍경 하나에 힘든 마음이 녹아버리기를 반복하며 로포텐은 나와 밀당을 했다.

스볼베르 공항


보되로 가는 비행기는 약 30명이 탈 수 있는작은 비행기였다. 탑승객은 나 포함해서 달랑 5명이었다. 흡사 비행 택시, 혹은 하늘을 나는 고속버스같은 느낌이었다.


곧이어 비행기는 이륙했다. 정말 로포텐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저 멀리, 어렴풋이 로포텐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로포텐은 생각보다 더욱 더 아담하게 보였다. 그 안에서 궂은 날씨에 맞서 견디고 거친 산을 올랐던 기억들을 이렇게 하늘 높은 곳에서 떠올리니 그저 웃음만 났다. 위데뢰에 항공사에서 준 작은 초콜릿 하나를 먹으며 로포텐에 다시 갈 날을 기약했다.


로포텐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건 사람들이었다. 로포텐의 사람들은 언제나 여유가 넘쳐 보였고 타인에게 베푸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역시 하우클란해변으로 가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와 레크네스까지 나를 태워준 형님이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라 도움을 주려 먼저 손을 내민 분들이다. 로포텐의 맑은 물처럼 100%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다가왔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이건 배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몸에 베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확신했다.


분명히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던 백패킹 여행이었지만,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뗄 수 없는 풍경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언젠가 로포텐을 다시 찾는다면, 그 때도 같은 감정으로 이 희노애락같은 섬을 기억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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