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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Aug 23. 2023

로포텐 2일차-1. 오(Å) 마을을 떠나 레이네로

험난했던 첫날 밤을 견뎌내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였다.

*여행 시기는 2018년 6월 초이며, 글 속 상황들은 현재와 다를 수 있습니다.


로포텐에서의 환한 첫 밤이 흘러 아침이 밝았다. '견뎌냈다'는 표현 말고는 첫날 밤을 묘사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밤새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더불어 텐트를 세게 두드리는 비와 싸락눈과 바람 소리에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억지로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피곤했는지, 중간중간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총 한 시간은 못 되게 잔 것 같다. 


아침이 되자 밤새 시끄럽던 하늘이 고요해졌다. 바깥 상황이 궁금해졌다.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텐트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바닥을 보니 싸락눈이 얕게 흩뿌려져 쌓여 있었다. 눈의 형체가 남아있을 만큼 여전히 기온은 낮았다. 식수를 얻고 풍경을 구경할 겸 코앞의 호수로 향했다. 주변이 잠잠해졌기 때문일까. 전날 궂은 날씨에 맞서 버티느라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던 호수 풍경이 이제야 들어왔다. 호수는 마치 파형처럼 굴곡진 산에 둘러싸여 있고, 여름을 앞둔 시점 막 푸르른 색깔로 옷을 갈아입는 산은 꼭대기와 골짜기엔 여전히 고운 밀가루처럼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여름과 겨울을 반반씩 섞어 놓은 풍경이었다. 호수 왼쪽 먼 편에는 갈매기들이 물가에 떼를 지어 앉아 하루를 열고, 오른쪽 먼 편에는 적갈색 오두막이 외로이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오(Å) 마을의 Ågvatnet 호수 풍경. 사진 하단 아라쪽에 오두막이 보인다.
오(Å) 마을의 Ågvatnet 호수 풍경

부드러워진 날씨만큼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텐트를 접으며 철수했다. 다음 장소인 레이네로 이동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 터널 앞에 도착했다. 터널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가자 휴게소같이 생긴 작은 건물과 주차장이 나왔다. 버스 정류장은 바로 여기 있었다. 출발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버스는 시동이 꺼져 있고 문이 닫힌 채로 정차중이었다. 건물 앞에 작은 벤치가 있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저 호숫가에서 밤새 그 악천후 속에 잠을 못 이룬 걸 다시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가긴 지나갔다. 그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버스 기사님이 어디선가 나오셨다. 단정하게 유니폼을 차려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곤 “안녕하세요”라며 짧게 인사를 나눴다. 전날 오 마을로 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계산할 때 잠깐 점원과 대면했던 걸 빼면, 로포텐에서 사실상 현지인과 처음 하는 대화였다. 홀로 호숫가에서 고군분투를 한뒤에 푸근한 미소를 짓는 기사님을 보니 괜히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배낭은 짐칸에 넣어두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기사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가세요?”

“레이네에 가려고 하는데요… 혹시 레이세카르트를 살 수 있나요?”


레이세카르트가 로포텐에서 쓸 수 있는 일종의 교통 카드라고 한다. 그래서 그 카드를 구매하려고 기사님께 물어봤는데, 내 발음이 이상했던 건지 기사님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래서 발음을 이리저리 달리 해가며 다시 물어보았다.


“레이세코르트인가 여행용 교통카드 같은 게 있지 않나요?”

“혹시 학생이에요?”

“네, 맞아요.”

“그럼 굳이 만들지 말고, 학생 요금 내고 타면 돼요.”

“버스를 탈 때마다 매번 끊으면 되는 건가요?”

“네. 학생은 요금이 반값이라서요.”


레이세코르트는 처음에 구매할 때 200크로네를 충전하고, 사용하다가 금액이 다 떨어지면 다시 충전하는 형태로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이다. 우리나라의 선불식 교통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다. 그리고 카드를 이용하면 성인 요금에서 20%를 할인해 준다. 그렇지만 학생은 일단 50% 할인을 기본으로 받을 수 있는 거니 그 카드를 쓸 이유도 없고, 쓴다고 해도 번거로울 수 있다. 기사님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나에게 알려준 것 같았다. 그렇게 티켓을 받고 자리로 가려는데,


“안전벨트 매는 거 잊지 말아주세요. 착용하지 않았다가 걸리면 벌금이 무려 1,500크로네랍니다.”


라며 친절하게 당부했다. 로포텐 버스 기본 요금의 무려 서른네 배! 우리 돈으로 무려 20만 원이다. 평소에 차는 물론 시외버스를 탈 때도 자리에 앉는 즉시 안전벨트를 착용해서, 기사님이 주의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100% 안전벨트를 착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벌금이 워낙 세니, 벨트 착용이 습관화되지 않은 여행자에게 이렇게 알려준다면 충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 경각심을 갖게 만들 수 있어 보였다. 당장 나도 더더욱 안전벨트를 매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구 약 2만 5천, 작지만 큰 섬인 로포텐의 각 지역을 버스가 이어준다.
로포텐을 다니는 버스 내부는 시외버스와 흡사하다.

종점인 오에서 버스를 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9시가 되자 버스는 곧장 출발했다. 이어지는 정류장에서 주민 몇 명이 탑승했다. 아주머니들은 자국 언어로 아마도 소탈했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노르웨이어에서 아는 단어라곤 인삿말인 Hei밖에 없었지만, 그분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노르웨이의 평범한 일상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로 적막했던 버스에는 조금 활기가 돌아 왠지 마음이 들떴다. 여전히 빗방울이 묻어 있는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이 보였다. 로포텐에 도착했던 어제와 날씨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오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이 흘러 레이네에 도착했다. 첫날 호숫가에 머물며 상상 이상으로 너무 고생한 탓에, 레이네에서는 숙소를 잡아서 한 템포 쉬어갈까 고민을 했다. 레이네에서 1박을 하며 동네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을 주변에는 마땅한 박지나 야영장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하루를 보냈을 뿐인데 여기서 잠시 무릎을 굽히긴 싫었다. 그리고 이날은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는 말도 다행히 없었다. 워낙 변덕이 심한 로포텐이라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하늘이 조금씩 개는 게 왠지 느낌이 좋아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생각대로 부네스 해변에 가기로 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오지이며, 하루에 몇 편 없는 배를 타고 들어가 언덕을 건너야 도착하는 외딴 해변이다. 그곳엔 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레이네 마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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