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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스크바에서 4년 살았잖아

by 박수소리

점심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방문객들이 아이스링크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스케이트가 처음인지 성인보조지지대를 손으로 잡고 링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란히 앉아 2층 관중석에서 링크를 내려다보던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스케이트 좀 탈 수 있어?"

"글쎄. 아주 조금? 잘 못 해."
"나는 있잖아. 저 지지대 필요 없어. 내가 모스크바에서 4년 살았잖아. 모스크바는 추워서 아이스링크가 좀 있거든. 거기서 많이 타봤어."
아이비에커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우리도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저기 내려가서 타자고 했다. 그는 반팔카라티를 입고 있었다. 분명 회사 점심시간에 살짝 나온 것 같은데 무슨 스케이트인가.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그렇게 얇게 입고서는 추워서 못 타."
"시원하고 좋은데? 저기 아래 봐봐. 저기 남자도 반팔 입고 있잖아."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캐비닛 앞 간이의자에 나란히 앉아 스케이트화를 신기 시작했다. 아이비에커는 신발이 불편한지 고개를 숙이고 연신 끈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스케이트화를 신는 긴긴 시간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비에커는 신발이 불편한지 뒤뚱거리며 링크로 입장했다. 모스크바에서 4년 살아 보조기구가 없어도 탈 수 있다던 아이비에커는 링크에 들어가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이비에커가 급한 대로 내 손을 잡고 꽈당할 위기를 넘겼다. 그가 중심을 잡기 위해 자세를 숙이니 카라티가 위로 올라가면서 속에 입은 하얗디 하얀 러닝이 보였다.


아이비에커는 반바퀴도 돌기 전에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난간을 붙잡고 원점으로 돌아와 하얀 성인지지대를 가져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너도 지지대 써."
약 2초간 고민했다. 모스크바에 4년 살아서 보조기구 없이도 잘 탄다는 아이비에커가 생존을 위해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지지대를 선택했는데, 내가 지지대가 필요 없다면 그가 머쓱하겠지. 하지만 15년 전 나와 달리, 나는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다.
"난... 필요 없어."

아이스링크를 몇 바퀴 휘휘 돌다가 보니 아이비에커가 없었다. 주위를 살피는데, 아이비에커는 어느새 아이스링크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분명 5분도 안 탄 것 같은데 웬일이지.
"괜찮아?"
"발이 너무 쑤셔. 신발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그때, 선생님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주원이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 못 타겠어요. 저 그만 탈래요. 엉엉엉."

그때 아이비에커가 중국어로 나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 주원이한테 통역해 줘. 주원아. 남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울면 안 돼. 씩씩하게 이겨내야 한다고도 말해줘."

여기서 남자가 또 왜 나오나. 아이는 엉엉 울고,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아이비에커에게 우즈베크어로 상황을 물어보고, 아이비에커는 중국어로 내 옆에서 쫑알쫑알 되지도 않는 충고를 해대니 순간 멍해졌다. 모든 걸 다 놓고 싶어졌다. 나는 드디어 결정 내렸다.

"아이비에커, 이제 그만 타야 될 것 같아. 선생님한테 수업 그만한다고 말해줘."

15분도 채 안 탔으면서, 다니엘라의 1시간 수업비를 내고, 아이비에커와 나의 30분짜리 스케이트비를 지불했다. 내가 돈을 쓰자, 인상을 쓴 아이비에커가 나를 막아서며 말했다.

"지금 너 뭐 하는 거야."

"오늘 나 마지막 날이고 어차피 우즈베키스탄 돈 어디 가서 쓸 일도 없어."

아이비에커를 가볍게 밀치고 돈을 지불했다. 아까 울어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주원이는 언제 울었냐는듯 태연하게 빵을 먹고 있었다. 아이를 유아차에 앉히고는, 도망치듯 스케이트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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