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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둘이 마당에서

by 박수소리

드디어 그가 원했던 그 순간이 왔다. 아이비에커와 나, 단 둘이었다.

모두 잠들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밤, 해는 졌고 호스텔의 마당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대화 나누기 딱 적당한 그런 밤이었다. 비록 그가 원하던 그의 차 안이라던지, 어느 음식점이 아닐지는 몰라도. 아이가 아이비에커로부터 나를 매번 지켜줬듯이, 호스텔 안 너른 마당이 이번에도 나를 지켜주리라. 그의 표정은 매우 지쳐보였다. 내가 원한 건 대화였지만, 그가 원한 건 대화 그 이상이었는지 모른다.


마당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호스텔의 지붕에서 물 방사형 스프레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 앉은 우리는 침묵속에 지붕에서 흩어져 뿌려지는 미세 물방울들을 바라보았다. 스프레이가 꺼지자 적막이 흘렀다. 그 때 아이비에커한테 찾아온 건 자파의 할머니였다. 타지키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의료방문을 온 자파와 자파의 할머니는 의료진료가 모두 끝나고, 우리처럼 내일 숙소를 뜬다. 자파네 할머니는 아이비에커한테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면서 러시아어로 말했다. 핸드폰에는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 속에 조잡하게 녹화된 인형극이 한창 상영중이었다.


"매직시티 있지. 저번에 내가 너네 데리고 구경시켜줬잖아. 거기서 하는 인형극이래. 자파랑 자파 할머니가 보러갔는데 재밌다고 꼭 보러 가라고 전해달래."

자파 할머니는 낮에도 넋놓고 마당 탁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그 동영상을 틀어주며 타지크어로 뭐라고 한 적이 있다. 아이비에커가 굳이 통역 안 해도, 자파 할머니가 나에게 여기가보라고 말한 건 이미 눈치코치로 알고 있었다. 내일 우리도 타슈켄트를 떠나고, 이미 매직시티는 가봤고, 이런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인형극은 우리가 가봤자 못 알아듣지만 권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에너지도 없었다. 아이비에커한테 된통 당하고 멘탈이 털린 나는 할머니에게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두 번 까딱였는데, 자파 할머니는 내가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비에커를 보고는 말 한것이다.


통역이 회사 주 업무 중 하나인 아이비에커는 통역할 기회가 있으면 수시로 모든 말을 기계적으로 나에게 통역해주려고 했다.
"그래, 아까도 자파 할머니가 나한테 말해주셨어."
"너 그럼 아까 알아들었단 말이야?"
"(웃음)야, 러시아어 못해도 손짓발짓 다 알아들을 수 있어."
나는 자파할머니에게 '라흐맛(감사합니다)!'이라고 하니, 자파할머니가 만족한 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색한 침묵도 잠시, 바허도 우리 숙소에 도착했다. 바허도 자리에 앉더니 숙소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바허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지만 역시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일과 간병을 동시에 하느라 수염도 못 깎았다. 나란히 앉은 바허와 아이비에커도 한동안 못 만났는지 우즈베크어로 근황을 나누었다. 그들의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바허와 아이비에커를 나는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는 정말 언제 만날지 모른다.


길쭉한 키다리 아저씨처럼 늙은 바허와 부잣집 사장님처럼 늙은 아이비에커, 그들의 눈, 코, 입, 머리카락, 티셔츠, 팔, 안경... 스캐너가 스캔하듯이 내 머릿속으로 하나 둘씩 집어넣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바허와 아이비에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대때의 바허와 아이비에커는 세상 근심 없는 장난끼 가득한 청년들이었는데, 집안의 가계를 책임지다보니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서안을 떠나고 난 후 15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1년에 1~2번 내 꿈 속에 놀러오곤 했다. 내용도 뭐 별거 없었다. 그들이 나를 찾아왔고, 같이 히히덕 대다가 꿈을 깨보면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모르는 가벼운 꿈들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비에커가 한국말로 웃으며 말했다.
"아라써?(우리가 주고 받은 우즈베크말 알아들었어?)"

한국인과 교류하지 않은지 어언 15년이 흘렀는데도, 아이비에커는 한국어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풋! 하며 웃었다. 웃고 나니, 낮에 있었던 사건들이 모두 없어지고, 긴장과 침묵도 없어지고, 우리는 다시 서북대학교 캠퍼스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바허의 친척이 교통사고로 몇 주째 입원중이고, 대가족 형태인 우즈벡에서 바허 식구들이 그 친척을 간호하고 있다고 아이비에커가 요약해줬다.
잠시 후 바허는 시계를 보더니, 아이비에커에게 뭐라고 하고 마당을 나갔다.
"기도하고 온대."
"너는 기도 안 해도 돼?

"기도 하기 전에 손, 발, 얼굴을 다 깨끗하게 닦았어야 해. 바허는 집에서 미리 닦아왔고, 나는 못해서 기도 할 수 없어. 못 한 기도는 나중에 다시 보충할 수 있게 되어 있어."

바허가 잠시 자리를 떠난 후, 아이비에커와 나 사이에는 다시 침묵과 어색함이 감돌았다. 바허가 떠난 후 저 멀리서 기도시간을 울리는 이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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